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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初 재계司正]① "시작은 창대, 끝은 미미"

  • 2013.11.12(화) 14:27

노 대통령 취임 2일 전 최태원 회장 구속
대선자금 수사로 확대…'용두사미'

5년 마다 정권이 바뀌는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재계를 5년 마다 불안에 떨게 한다.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000 후보가 되면 00그룹은 망한다' '00그룹이 괘씸죄에 걸렸다' '이번엔 00그룹이 시범케이스가 된다'는 미확인 소문, 괴담들이 판을 친다.

 

전(前) 정권에서 임명된 공기업 사장은 물론 KT, 포스코, KT&G  처럼 민영화된 공기업의 CEO는 임기 끝까지 버텨야할 지 고심을 거듭한다. 단임제 대통령의 임기 초반 재계를 대상으로 한 사정(司正·그릇된 일을 다스려 바로잡음)에는 저마다 사정이 있다. 새 정부 들어서는 세무조사의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 정부에서부터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권초반 이뤄진 사정한파의 배경과 파장을 점검해본다. [편집자]   

 

▲ 2008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이임하는 노무현 전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


 

◇ 취임식 이틀 전 재계 3위 총수 구속

지난 2003년 2월 1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그룹 사옥에 갑자기 검찰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하며 당시 그룹의 가장 핵심 조직이었던 구조조정본부 사무실은 물론이거니와 그룹 회장실까지 들어와 닥치는 대로 서류과 컴퓨터 등을 박스 안에 담아갔다.

 

수사를 맡았던 서울지검 형사9부는 이틀 뒤 한번 더 압수수색을 했고, 그룹 오너인 최태원 회장은 SK글로벌의 1조5천억원대 분식회계(배임) 혐의로 구속을 면치 못했다. SK그룹은 물론 재계 전체가 "새 정부의 재계 사정이 시작됐다"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2월 23일 최 회장이 구속된 이틀 뒤인 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렸다. 당선 직후 기자회견 이후 2003년 신년사, 이날 취임사에서까지 노 대통령이 수도 없이했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을 재계는 믿지 못했다. 정권 초반 재계 사정의 다음 타켓으로 LG, 한화, 두산 등이 거론됐다.

▲ 최태원 SK회장이 2009년 5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역사박물관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 경제 악화…"사정 속도 조절"

재계는 초긴장 상태에서 숨죽인 채 바짝 엎드렸다. 이 때 노 대통령은 곧바로 재계를 향해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낸다. 취임식 하루 뒤 노 대통령은 새 정부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잘못한 것은 바로잡아야 하지만 그 과정은 아주 합리적이고 냉정하게 진행해야 한다"며 "사정활동 속도조절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서 국민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사정 속도조절론'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는 특히 "정권이 출범하면 사정과 조사활동이 소나기 오듯 일제히 일어나는 경향이 있어 국민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정권 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느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역대 정권 초기에 관행처럼 이뤄진 '집단 사정'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유는 경제 상황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노 대통령의 언급이 현재의 경제상황을 고려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했다.

◇ 대선자금 수사…전방위 사정과는 거리

그러나 검찰의 SK 수사는 만질수록 커졌다. SK그룹 계열사들이 분식회계로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을 불법적으로 정치권에 제공한 것이 확인되면서 사상 초유의 대선 자금 수사로까지 확대됐다. 서울지검의 수사가 불법 정치인·재계의 '저승사자'였던 옛 대검 중수부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2003년 8월 말 SK 비자금 수사로 시작된 9개월 동안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검찰은 한나라당 823억원, 노 후보 캠프 120억원 등 943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밝혀냈으며 정치인 30여명, 삼성, LG, 현대차, 한화 등 주요 기업인 20여명을 기소했다.

▲ 2003년 대선자금 수사를 맡았던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지난해 대선에서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으로 박근혜 후보를 도왔다.


하지만 이는 노 대통령 본인과 다수 측근이 수사 대상이 됐던 만큼 역대 정권 초반기 사정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검찰 수사 도중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기업인 (사법)처리를 원치 않는다"고 밝힐 정도였다. 결국 사법처리된 재벌 총수는 조양호 한진 회장과 김준기 동부 회장 2명 뿐이었다. 나머지 총수들은 불법자금 제공이나 비자금 조성 등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의혹을 받았지만, 대부분 소환조차 되지 않았다.

참여정부 초기 '신(新) 5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부패·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재벌과 강남, 서울대, 검찰, 언론을 꼽은 것이다.70년대 김지하 시인의 시 '5적'(재벌,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신·구 5적의 공통분모인 재벌들은 노무현 정권 출범 1년 간 이뤄진 검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의 '3각 사정' 한파에 벌벌 떨었지만, 당초 걱정한 대로 때려 잡히지도, '초토화'되지도 않았다.

◇ "포스코 회장은 안된다"
 
노 대통령은 포스코와 같은 민영화된 예전 공기업에 대해선 일반 기업들과 다른 차원에서 접근했다.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2003년 1월 "민영화한 기업의 경우 CEO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며 "영구 집권하려는 사실상 민간기업의 오너와 같은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와 KT를 직접 지목하면서. 또 2월에도 "민영화된 기업의 지배구조가 민영화 취지에 맞게 설계돼 있는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병폐인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 문제가 대주주 없는 민영화 기업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당시 유상부 포스코 회장은 이사회에서 회장 후보로 재추천됐고, 본인도 유임을 강력하게 희망했으나 기업은행, 대한투신 등 정부계 기관투자가들이 연임 반대의사를 밝히는 등 유무형의 압박에 주총 직전 사퇴했다. 이처럼 정권 초 사정은 검찰, 국세청 등의 '칼'까지 뽑지 않아도 이뤄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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