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물건을 구매하려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죠. 문명사회 이전에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화폐가 발달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폐와 주화 즉 현금이 지급수단의 핵심이 됐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도 결제할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은행계좌를 기반으로 결제하는 신용카드뿐만 아니라 모바일로 바코드를 '삑' 찍기만 하면 결제할 수 있는 간편결제시스템까지 등장했는데요. 휴대전화 하나만 들고 다니면 현금이 없어도 결제가 되니 사람들은 굳이 지갑에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2018년 지급결제동향'에 따르면 현금 이외의 지급수단(신용카드, 소액결제 등)을 이용해 결제한 금액은 하루 평균 80조6000억원으로 전년(76조8000억원)대비 4.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 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출액 2조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국내 최대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는 현금을 받지 않는 매장을 대폭 넓혀나가는 등 변화하는 화폐거래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곳 중 하나인데요.
#서울시내 스타벅스 10곳 중 7곳은 현금결제 'NO'
스타벅스는 지난해 4월 '현금 없는 매장'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제도시행 당시만 해도 판교H스퀘어점, 삼성역점, 구로에이스점 등 현금 없는 매장은 3곳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전국 스타벅스 매장이 1000개가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치죠.
이후 스타벅스는 적극적으로 '현금 없는 매장'을 늘려 올해 12월 기준 전국 스타벅스 매장 1354개 중 '현금 없는 매장'은 810개(51%)에 달합니다. 적극적으로 현금 없는 매장을 늘린 겁니다.
'현금 없는 매장'은 유독 서울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요. 서울시 25개 자치구에 위치한 507개 스타벅스 매장 중 '현금 없는 매장'은 368개입니다. 서울 시내 전체 매장 중 73%가 현금을 받지 않는 매장인 것이죠.
스타벅스커피코리아 관계자는 "현금 결제 비율이 줄어들고 모바일 결제 사용률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환경 변화에 대응한 선제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현금 없는 매장을 도입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현금 없는 매장을 맞닥뜨린 일부 소비자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은 매장 10곳 중 7곳이 '현금 없는 매장'인 만큼 사실상 스타벅스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현금 대신 신용카드 등 비현금 지급결제수단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상 현금만 가진 소비자가 스타벅스를 방문해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죠.
지난 9일 서울 여의도의 '현금 없는 매장'을 방문해 현금결제가 가능한 지 여부를 확인해봤습니다. 기자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뒤 현금결제를 시도하자 해당 매장 관리자는 "현금 없는 매장에서는 준비해 둔 잔돈이 부족해 현금 결제를 할 수 없다"며 "대신 스타벅스 자체 카드를 구매해 결제하는 방법이 있다"고 안내했습니다.
스타벅스커피코리아 관계자는 "현금 없는 매장에서 현금결제를 요구하는 고객에겐 1차적으로 현금을 받지 않는 매장이라는 점을 알리고 그 다음에 스타벅스 자체카드를 구매하도록 유도하는데 그래도 고객이 현금결제를 원한다면 현금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기자가 방문한 스타벅스에서는 현금결제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스타벅스의 '현금 없는 매장'에 대해 인터넷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현금으로 결제하고 싶으면 스타벅스 카드를 구매해 결제하라고 한다', '이제 현금은 아예 사라져야 하는 건가', '카드 없는 사람들은 힘들 것 같다' 등 다양한 반응들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 간편결제 이용비율, 20대 56.2% VS 70대 1.7%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가 가져올 장점도 있지만 부작용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영국 언론 BBC는 지난해 4월 '현금 없는 사회가 모두에게 이익이 될까?'라는 기사를 통해 '노인들처럼 카드나 디지털 방식의 결제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고 통신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시골 지역의 소규모 상인들에겐 현금 없는 사회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발표한 '2017년 지급수단 이용행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연령이 높을수록 신용·체크·직불카드 등 지급카드 보유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0대의 신용카드 보유비율은 94.7%에 달하는 반면 70대 이상은 44.2%로 40대 보유비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기기를 이용해 상품구매대금을 지급하는 모바일지급서비스 이용비율 역시 연령대가 높을수록 낮게 나타났습니다. 한국은행이 5월 발표한 '2018년 모바일 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간편결제 서비스이용비율은 20대가 56.2%인 반면 70대이상은 1.7%에 불과했습니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신용카드나 모바일지급서비스 등 비현금지급결제수단을 사용하는 비율이 낮습니다. 현금 사용에 익숙한 고연령층은 일일이 현금을 받는 매장을 직접 검색해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서울시내 스타벅스를 방문해도 커피 한 잔 사먹기 어렵게 된 것이죠.
#현금 안 받는 매장…법적 문제는
한국은행법 제 48조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은 법화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1000원, 5000원 등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와 100원, 500원 등 주화 등 현금은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는 뜻입니다. 이를 '법화의 강제통용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금이 언제나 강제통용력으로써의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래를 하는 당사자 간에 현금을 받지 않기로 합의한다면 다른 결제수단으로 거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스타벅스가 시행하는 현금 없는 매장 제도가 당사자 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지난 9월 한국은행 금요강좌에서 '현금없는 사회의 법정책적 과제'를 주제로 강연을 맡은 정순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스웨덴의 한 레스토랑이 오직 신용카드만 받는다는 문구를 공지하고 있는데 이 정도의 공지면 거래당사자간 지급수단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느냐가 핵심 문제"라며 "스웨덴은 인정한다는 게 당국의 유연한 입장이지만 우리나라는 이를 고민해야 할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스타벅스 매장 앞에 '현금 없는 매장'이라는 공지가 거래당사자간 현금이 아닌 결제수단으로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아직까지 정해진 것이 없다는 설명입니다.
해외에서는 현금을 받지 않는 행위로 인해 노인 등 디지털약자가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법으로 금지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는데요. 덴마크는 자국의 지급서비스법에 '자금세탁 및 테러자금 조달, 무인셀프서비스 환경 등을 제외하고 반드시 수취인은 현금 지불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덴마크국립은행(National Bank of Denmark)은 지난 2017년 한 연구를 통해 "현금 사용량이 감소하는 것과 상관없이 현금은 계속 결제수단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며 "일부 덴마크인들은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 살고 있지만 다른 덴마크인들은 현금이 일상 생활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현금 수취를 거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개정안이 올라와 있는 상태인데요. 지난 5월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개정안은 가맹점이 거래과정에 있어 이용자에게 특정한 지급수단을 강요하거나 전자화폐 등을 사용해 거래하는 이용자를 달리 대우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