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아파트를 짓고 다리를 놓고 공장을 건설한다. 이런 피조물에는 건설인의 피와 땀이 녹아 있다. 올해도 건설사들은 국내외 현장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풍성하게 수확했다. 올해 가장 관심을 끈 분양 현장, 지도를 바꾼 해외 사업장, 주목할 만한 건축 및 토목 구조물 등을 소개한다.[편집자]
싱가포르는 인구 560만명의 도시 국가다. 국토 면적은 697㎢로 서울(605㎢)보다 조금 넓다. 그런데 이 나라는 총 1억8300만배럴이나 되는 유류비축 계획을 갖고 있다. 50리터씩 차에 넣으면 총 5억8000만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규모다. 산업시설이 훨씬 많은 우리나라의 3차 석유비축계획(~2013년) 목표(1억4100만배럴)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싱가포르가 엄청난 규모의 석유비축계획을 가진 것은 동남아시아의 '오일 허브(Oil Hub)'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지만 태평양과 인도양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이 석유 중계기지 역할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좁은 땅이 문제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바다 밑이다. 해저에 동굴을 만들어 비축고로 활용하면 오일 허브의 규모를 키우면서도 한정된 국토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구상에 따라 지난 9월 싱가포르의 첫 해저 유류비축기지가 만들어졌다. '오일 허브 싱가포르'의 핵심이 될 이 시설은 한국 건설사인 현대건설이 만들었다.
◇ 싱가포르서 지하공간 개발 '신기원'
지난 9월2일 현대건설은 싱가포르 주롱섬에서 '주롱 해저 유류기지(JRC, Jurong Rock Cavern Project) 1단계' 사업 준공식을 가졌다. 이 준공식에는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가 참석할 정도로 현지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주롱섬은 한국·중국·일본 같은 주요 석유소비국 기업들이 입주해 석유를 거래하는 곳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국영기업 주롱타운사(JTC, Jurong Town Corporation)가 발주한 이 공사는 주롱섬 남쪽 반얀(Banyan)만 지하 130m 암반에 150만㎥950만배럴의 유류 저장시설을 건설하는 한편 지상에 유조선 접안·운영 시설을 설계·시공하는 프로젝트다. 저장시설은 축구장 84개 규모로 30만톤급 초대형 유조선 5척과 맞먹는 규모다.
총 사업비 7억2500만달러가 투입된 이 비축기지는 일반 도로터널이나 광산과 달리 다양한 최첨단 건설공법이 필요했다. 단순히 암반을 깨고 넓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하 100m 및 130m 지점에 각종 운전시설과 유류 저장탱크(길이 340m×2개) 5기(機)를 1층과 2층으로 나눠서 지어야 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전체 터널의 길이는 11.2㎞지만 각 비축탱크마다 다른 유종을 저장하는 '개미집' 구조로 돼 있어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복잡한 토목공사였다"고 말했다. 이 시설은 부분준공 후 상업운전이 시작된 상태로 현재 마무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 "바닷물도, 기름도 샐 틈 없는 해저터널"
해저 암반을 뚫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곳곳에서 쏟아지는 바닷물을 틀어막는 일. 2010년 1월에는 당초 예상보다 10배 이상 많은 바닷물이 터널 안으로 밀려들어와 발파작업은커녕 시멘트로 물줄기를 막는 데만 다섯 달 가까이 허비했다. 암반 속 해수 압력은 10바(bar) 정도(수심 100m 수압)에 달한다.
현대건설은 굴착 전 미리 드릴로 암반에 구멍을 뚫어 고압의 시멘트를 분사하는 일반적인 '프리 그라우팅(Pre-Grouting)공법' 대신 먼저 암반에서 지하수를 빼낸 뒤 굴착을 진행하고 이후 작은 구멍을 뚫어 시멘트를 채워어 차수 작업을 마무리하는 '포스트 그라우팅(Post-Grouting)'을 썼다. 이를 통해 시간을 단축해 작업에 성공했다..
또 비축탱크에서 석유가 새거나 석유증기(oil vapour)가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공 수막(Water Curtain) 공법도 도입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는 원리를 이용해 비축탱크 바깥 벽 암반에 물을 채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저장동굴 주위에 수압이 가해져 기름이 안전하게 가둬지고 암반 사이 빈 틈도 메워져 석유증기가 퍼지지 못한다.
▲ 싱가포르 주롱 해저 유류비축기지 개요(자료: JTC) |
현대건설은 지난 1981년 풀라우 테콩 매립공사를 시작으로 싱가포르에 진출한 후 총 79건, 127억7000만 달러 규모의 공사를 수주했다. 이번 해저비축기지 프로젝트를 발판으로 추후 발주될 공사에서도 수주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이규재 현대건설 JRC 현장소장은 "2개층으로 이뤄진 해저터널 안에서 운영장비와 운전시설을 설치하는 쉽지 않은 목표를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달성했다"며 "잔여공사도 최고의 품질로 준공해 2단계 사업 수주에 발판이 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