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가 신청서는 우리 쪽(국토교통부)에 냈지만 공정거래위원회 쪽을 더 신경 쓰고 있겠죠. 사실상 '합작 가부'는 경쟁당국에서 판가름 난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간단치는 않아 보이긴 하는데…"
대한항공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미국 델타항공과의 조인트 벤처(JV)를 두고 국토부 항공정책실 한 관계자가 한 말입니다.
대한항공은 델타항공과의 JV 시행 신청 서류를 지난 18일 국토부에 제출했습니다. 델타항공도 이에 맞춰 현지에서 미국 교통부(DOT, Department of Transportation)에 관련 서류를 냈다고 합니다. 두 항공사는 태평양 노선을 한 항공사처럼 운영하기 위한 합작을 준비하고 있죠.
# '대한항공-델타' 태평양 노선 합치면
항공사 조인트 벤처는 좌석 일부를 공유하는 기존 '코드셰어(공동운항)'나 마일리지 및 라운지를 공유하는 '항공 동맹(얼라이언스)'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협력 형태입니다. 대한항공과 델타항공은 2000년 '스카이팀'이라는 동맹체를 함께 창설한 원년 멤버였죠.
두 항공사가 지분을 출자해 실질적인 합작 회사(JV)를 설립하는 형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노선 스케줄을 짜는 단계부터 긴밀히 협력하고, 양사의 노선들이 환승 등에서 최상의 시너지를 가질 수 있게 배분하는 매우 높은 수준의 협력 방식입니다. 공동 영업을 통해 수익과 비용을 공유하는 '혈맹(血盟)'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조인트 벤처는 현실적으로 국내 항공사가 닿을 수 있는 외항사와의 최상위 협력 단계입니다. 항공법상 국적 항공사는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는 경우 혹은 외국인이 등기이사로 참여하는 등 사실상 외국인에게 경영권을 주는 경우를 아예 '면허 박탈' 조건으로 두고 있어서죠. 항공기는 국가비상사태가 벌어졌을 때 정부에 징발될 수 있는데, 외국인이 경영권을 쥐면 국제적 이해 상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항공은 JV가 시행되면 미주내 290여개 도시와 아시아내 80여개 도시 등 태평양 노선을 지금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승객들이 다양한 스케줄과 환승시간 감소, 탑승권 인하 및 마일리지 혜택 확대 등 효과를 누리게 된다는 거죠. 올 연말에는 스카이팀 전용의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T2)' 개장도 예정돼 있어 사업적 시너지는 더 클 걸로 보입니다.
# '시장 점유율' 얼마나 커지길래
그런데 왜 대한항공이 주무부처인 항공당국보다 경쟁당국의 눈치를 보는 걸까요? 관건은 항공 시장 지배력이 과도하게 커질 우려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항공사가 특정 노선에서 완전히 같은 회사처럼 운영되면 독과점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거죠. 이 때문에 항공당국 허가가 필요한데, 국토부는 시장 독과점 판단은 공정위에 의뢰해 결정하게 됩니다.
한국공항공사 등에 따르면 지난해 여객수 기준 한·미 노선 수송실적 점유율은 대한항공 49.5%(1위), 델타항공 7.4%(3위)입니다. 현재 상태에서 단순 합산해도 시장 점유율이 과반을 넘는 56.9%가 됩니다. 한·미간 12개 노선중 델타항공은 1개, 대한항공은 4개 노선을 각각 독점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두 항공사 점유율 합이 50%이상인 노선도 4개입니다.
항공사 조인트 벤처는 2009년 미주-유럽간 대서양 노선에서 시작된 이후 최근까지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는 추세이긴 합니다. 태평양 노선에서도 일본을 기점으로 '원월드' 얼라이언스의 아메리칸항공-일본항공(JAL), '스타' 얼라이언스의 '유나이티드항공-전일본공수(ANA)'가 JV를 시행하고 있죠.
하지만 가로막힌 적도 있습니다. 미국 교통부(DOT)는 작년 12월 아메리칸항공과 호주 콴타스항공의 JV를 불허했는데요. 근거가 된 것이 미국~호주 노선 점유율이 콴타스 53%, 아메리칸 6% 등 총 59%라는 점입니다. 항공 여객 편익은 크지 않은 반면 경쟁을 저해하고 소비자 선택을 훼손하는 측면이 크다고 미 항공 당국이 결론 내린겁니다.
▲ 대한항공은 지난달 23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윌셔 그랜드 센터에서 델타항공과 태평양노선 JV 운영을 통한 협력 강화 협정을 맺었다. 오른쪽 세번째부터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에드 바스티안(Ed Bastian) 델타항공 최고경영자, 스티브 시어(Steve Sear) 델타항공 국제선 사장 및 글로벌 세일즈 전무(사진: 대한항공) |
# 15년전 美서 받은 반독점면제권 효력은
일단 대한항공은 자신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대한항공과 델타가 미 항공당국으로부터 JV 설립 전제조건인 '반독점면제권(ATI·Anti-trust immunity)'를 받아 둔 것이 낙관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두 항공사는 미국 교통부(DOT)에는 2002년 JV 인가 신청서를 냈고 이때 공익과 자유로운 경쟁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인증인 ATI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구체적인 협정 내용이 제출되지 않은 상태였고, 또 시간이 15년이나 흐른 상태라는 게 변수입니다. 델타는 이 기간 동안 노스웨스트항공 등을 인수하면서 덩치를 키웠고, 대한항공도 저비용항공(LCC) 진에어를 자회사로 두는 등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왔다는 게 JV를 불편하게 보는 경쟁사들의 논리입니다.
미국에서는 LCC인 제트블루와 하와이안항공 등이 대한항공과 델타의 ATI를 재검토 해야한다는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2013년 샌프란시스코 착륙 사고로 받은 해당 노선 45일 운항정지 행정처분도 받아둔 게 있어 더 마음을 졸이고 있답니다. 현재 같은 스타 얼라이언스 소속 유나이티드 등과 JV를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인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JV가 항공 소비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게 숙제입니다. 여기에 새 정부 공정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도 부담입니다. 일각에는 조원태 사장이 지난달 대한항공 외 모든 계열사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것을 이와 연결한 시각도 있습니다. 역시 공정위에서 다루는 일감 몰아주기 등 지배구조 개선 이슈까지 얽혀 있는 것이 자칫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라는군요.
대한항공이 야심차게 추진한 조인트 벤처가 과연 별 문제없이 출발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