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갑(Super 甲)'.
건설사들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이렇게 부릅니다. 주택을 분양하려면 분양 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법적으로 보증이 가능한 기관은 HUG 한 곳 뿐이거든요. '갑 중의 갑' 이라고 불릴 만하죠.
하지만 최근 건설업계에서 HUG의 독점 권한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보증 업무를 민간 시장으로 개방해달라는 건데요. 왜 이런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국내에서 30가구 이상의 주택을 선분양(건물을 짓기 전에 분양하는 것) 하려면 분양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분양 보증이란 분양사업자가 파산 등의 사유로 분양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될 경우 보증기관이 주택분양의 이행 또는 납부한 계약금과 중도금의 환금을 책임져 소비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분양 보증을 받을땐 주택도시기금법 제16조에 따라 HUG 또는 보험업법 제2조26호에 따른 보험회사 중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정하는 보험회사에서 받도록 돼 있습니다. 그동안 국토부장관이 분양 보증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보험회사를 지정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사실상 분양 보증 시장에선 HUG가 독주하고 있는 상태죠.
권한이 집중되니 힘도 나날이 세졌습니다. 분양 보증 제도를 이용해 분양가격까지 통제하고 있는데요. 건설사들이 분양 보증의 민간 개방을 요구하는 실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HUG는 보증리스크를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서울, 과천 등을 고분양가 관리지역으로 지정하고 분양 보증 전에 분양가 심사를 하고 있습니다. 분양가 산정 기준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분양가를 정하게 하는건데, 최근엔 그 기준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지난 6일엔 '고분양가 사업장 심사 기준'을 개정해 아파트를 신규 분양할 때 평균 분양가의 100% 이내에서 분양가를 정하게 하는 등 분양가 통제 기능을 종전보다 강화했습니다. 사업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분양가를 낮추자니 수익이 줄어들고 높이자니 HUG가 보증서를 발급해주지 않아 분양이 차일피일 미뤄져 금융비용 등 손해를 보게 되니까요.
결국 HUG와 분양가 줄다리기를 하던 일부 단지들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분양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준공 후 분양'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후분양으로 가닥을 잡은 삼성동 상아2차의 경우 HUG에서 제시한 분양가가 이 일대 시세보다 2000만원가량 낮은 3.3㎡(1평)당 4569만원으로 알려졌습니다.
건설업계에서 불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주택협회는 회원사들의 의견을 모아 "2020년까지 분양 보증 시장을 개방해 경쟁체제를 도입하라는 공정위원회 합의를 서둘러 추진해달라"는 내용을 국토교통부에 건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HUG가 일방적으로 분양가를 통제하고 분양보증을 독점 발급해 보증 발급 지연 사례가 늘고 보증료 등의 가격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시장 개방의 필요성을 설명했습니다.
HUG의 독점 체제가 막을 내리면 시장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우선 보증료가 기존보다 저렴해질 수 있습니다. HUG 외에도 분양 보증서를 발급하는 회사가 많아지면 경쟁 구도가 성립돼 보증료율이 낮아지고 이를 반영한 아파트 분양가도 낮아질 수 있겠죠.
분양보증료는 보증금액, 보증료율(신용평가등급별 상이), 보증기간에 해당하는 일수를 곱한 뒤 365로 나눠 산정하는데요. 대지비 보증료율은 연 0.138%, 건축비 보증료율은 연 0.178~0.531% 수준입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분양보증 수수료는 분양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긴 하지만 보증료율이 인하되면 그만큼 사업비 등을 절감할 수 있어 분양가에도 일정 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도 "다양한 회사가 경쟁을 하게 되면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새로운 보증상품이 나오고 보증료율이 개선될 수 있다"며 "소비자에게도 유리하고 산업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건설사들은 현재 가장 문제로 꼽히는 분양 지연 등의 사태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보증 기관이 늘어나니까 보증서 발급 업무가 더 원활해지고 민간기업이 시장에 들어오게 되면 규제의 올가미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분양 보증 창구가 늘어나면 보증 발급 병목 현상이 사라지면서 수도권 주택공급이 원활해질 것"이라며 "아울러 분양보증 발급이 지연되면 한달에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달하는 금융비용 이 발생하는데 이를 절약할 수 있어 수분양자에게 분양가로 전가되는 문제가 사라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산업 발전의 가능성도 엿봤습니다. 이 연구원은 "분양 보증 시장이 민간 보험사로 확장되면 보험업계에도 활력이 돌 수 있다"며 "보험사들의 신사업 개발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아파트 시장이 열린다면 실적 성장뿐만 아니라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업계에선 전체적으로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는 모습인데요.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시장을 개방하면 주택시장 과열에 따른 분양가 통제가 어려워질 우려가 있고요. 선택지가 넓어져도 소비자 입장에서 공공기관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장 불균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이은형 연구원은 “HUG가 독점으로 분양 보증을 발급하며 분양가 통제를 해왔는데, 이 업무가 분산되면 자연스럽게 통제 기능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며 "아울러 민간시장으로 개방이 돼도 좀 더 안정적으로 보이는 공공기관으로 소비자들이 쏠리는 현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연구원은 "민간 보험사 등까지 시장을 개방해주는 것이 아니라 동일 업무를 하는 '제2의 HUG'를 만든다면 암묵적인 신사협정이 체결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도 표했습니다.
이처럼 분양 보증 업무의 시장개방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실현되기까지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미 15년째 필요성만 제기됐을 뿐 계속해서 시점을 뒤로 미루고 있기 때문이죠.
2005년부터 '분양보증 업무의 독점으로 인한 경쟁 제한' 등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는데요. 2008년 ‘3차 공기업 선진화 추진계획’으로 2010년 이후에 분양보증 독점권을 폐지하기로 했다가, 막상 2010년이 되자 시장 개방 시기를 다시 5년 뒤로 연기했습니다.
이는 또 한번 미뤄져 2017년 공정위와 국토부가 '경쟁제한적 규제에 대한 개선안'을 내면서 HUG의 주택분양 보증 영역을 2020년까지 시장에 개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실행 시점이 세번이나 미뤄진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론 HUG의 공적 역할이 확대됐기 때문입니다. 민간 시장에 개방하기엔 주택시장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너무 커진 겁니다.
무엇보다 HUG의 분양 보증 업무가 민간 영역으로 분산되면 분양가 통제기구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라 정부가 쉽사리 손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토부와 공정위가 2020년까지 시장 개방을 합의했지만 '주택시장 상황을 고려해 결정한다'는 입장이라 건설사들은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의심하고 있는데요.
건설업계는 HUG의 설립 목적이 분양 보증 등 안전장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역할과 기능을 다시 한 번 정비해야 될 때라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