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서 1000가구가 넘는 빌라 등을 임대한 '빌라왕'이 사망하면서 전세 사기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집주인의 전세보증금 미반환으로 보증기관이 대신 갚는 보증사고 규모 또한 커졌다. 결국 임차인들은 사기 위험을 피해 월세로 눈을 돌리는 분위기다.
정부가 급히 나서 전세대출 연장 등 대책을 내놨지만, 피해 규모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집값 하락이 지속하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례는 더 증가할 수 있다. 보증보험 가입 의무화 등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갭투자 후폭풍…깡통전세 피해 급증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11월 보증사고 건수는 852건으로 전월(704건)에 비해 148건 증가했다. 사고 금액 또한 한 달 만에 22%(336억원) 증가해 1862억원에 달했다. 처음 집계를 시작한 올해 8월과 비교하면 사고 건수는 67%(341건), 금액은 71%(773억원) 늘었다.
보증사고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한 임차인이 전세보증금을 되돌려받지 못해 HUG가 대위변제한 사례다.
보증사고가 급증한 건 올해 들어 부동산시장 침체로 집주인들의 자금 사정이 악화한 영향이다. 집값 급등기엔 전세보증금으로 집값 대부분을 충당하는 '갭투자'가 가능했지만, 매맷값과 전셋값이 동반 하락하면서 보증금을 반환하기 어려워졌다.
수도권에서 빌라, 오피스텔 등 1139가구를 보유한 일명 '빌라왕' 사례가 대표적이다. 빌라왕 김 모씨는 갭투자로 주택을 사들였고, 보증금을 되돌려줄 능력이 없는 채로 최근 사망했다. 작년 종합부동산세 체납액만 62억원에 달한다.
피해 가구 중 440가구는 보증보험에 가입했어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HUG는 임대차계약이 해지된 뒤 보증금을 대위변제하는데, 김모 씨가 사망하면서 계약 해지를 통보할 대상이 사라졌다.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임차인들의 불안은 더욱 크다. 현재 임대사업자에만 전세 보증보험 가입이 의무화됐다. 집주인이 임대사업자가 아니더라도 보증보험에 가입할 수는 있지만, 가입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HUG의 경우 전세보증금은 7억원 이하, 이외 5억원 이하로 제한한다. 경매신청, 가처분 등 권리침해사항이 없어야 하고, 선순위채권이 주택가격의 60% 이내여야 한다. 홍기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이같은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 가입이 거절된 사례가 올해 1~8월에만 1765건에 이른다.
대책은 '걸음마'…"제도 전면개편 필요"
정부가 급히 전세 피해 대책을 내놨지만, 이제 계획을 세우는 단계다. 먼저 지난 9월 서울 강서구에 최초로 개소한 전세피해지원센터를 지역별로 확대할 예정이다. 법률상담을 무료로 제공하고, 임시 주택 등 긴급주거지원도 진행한다.
당장 머물 곳이 없는 피해자에는 HUG와 LH의 재고 주택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LH가 인천에 피해자를 위한 주택 182가구를 확보했지만, 모든 피해자가 거주하기엔 부족한 상황이다. 올해 11월까지 인천에서 발생한 보증사고만 274건에 이른다.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 전세를 포기하고 월세로 이동하는 임차인들이 늘고 있다. 서울부동산광장에 따르면 20일 기준 올해 이뤄진 월세 거래는 총 8만9920건으로 이미 작년 1~12월 거래 건수(8만2567건)을 초과했다. 같은 기간 전세 거래는 12만4717건으로 작년보다 5.5%(7211건) 적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전세 보증보험료는 보증금 1억원에 22만~30만원(2년) 정도인데 깡통전세를 피하기 위해 이 정도 금액을 지불하는 것은 세입자에게 부담"이라며 "금리 인상으로 전세대출 이자가 증가하는 것도 월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현행 전세 제도에 전면적 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직적인 전세 사기가 아니더라도 최근 계속된 전셋값 하락으로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임차인이 증가할 수 있어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일 기준 전국 전세가격은 작년 말에 비해 6.5% 하락했다.
개인 임대인에도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되 저소득층엔 보증보험료를 지원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계약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 HUG 등 제3의 기관이 보증금을 보관하는 '에스크로우 제도'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세입자에게 모든 위험을 알아서 조사하고 예방하라는 것은 사기를 당하라고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며 "전세금 에스크로우 제도와 전세금 일부를 보증보험기관이 의무 예탁받는 '전세금 예탁제도' 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