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은 것이라는 말이 있죠?
최근 명단이 폭로되면서 관심을 받는 '역외탈세'도 나라 살림을 좀먹는 도둑질 중 하납니다. 지난 4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등이 폭로한 명단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씨를 비롯해 195명의 한국인이 역외탈세 혐의자로 지목됐습니다.
역외탈세(域外脫稅, offshore tax evasion), 쉽게 말해 글로벌 탈세인데요. 국내에서 소득이나 재산을 숨겨 탈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로 재산과 소득을 빼돌려 세금을 내지 않는 방법이죠. 국내에 숨겨 놓은 소득보다 멀리 해외에 숨겨 놓은 소득일수록 국세청이 찾아내기가 어려우니까요.
방식은 단순한데요. 국내에 살고 있으면서 살지 않는 척, 국내에서 소득이 발생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소득이 발생한 척 속이는 겁니다.
세금은 거주하고 있는 지역, 그리고 소득이 발생한 지역을 기준으로 부과되는데요. 다른 나라에 살거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들인 소득일 경우 국내에서 과세하기 어렵습니다. 역외탈세자들은 이런 점을 악용해서 페이퍼컴퍼니, 즉 서류에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가상의 계좌를 만들어서 거래합니다.
페이퍼컴퍼니는 세금이 없거나 우리나라보다 낮은 세율로 세금을 매기는 나라에 설립하는데요. 그래야만 빼돌린 재산에 대해 해외에서도 세금을 부담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세금이 없거나 낮은 곳을 조세회피처, 혹은 세금 없는 천국이라는 뜻에서 택스 해븐(tax haven), 택스 파라다이스(tax paradise)라고도 부르는데요. 버진아일랜드, 라부안, 케이먼군도, 마샬군도 등 태평양이나 대서양의 작은 섬나라들이 대부분입니다. 제주도의 몇십분의 1 크기의 작은 섬에 수만개의 유령회사가 존재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곳은 세금을 피하려는 세계 각국의 기업들도 몰리는데요.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조세회피처로 유출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자금만 545조원에 달하는데요. 이중 187조원이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군요.
역외탈세 방법은 다양합니다.
국세청에 최근 적발된 사례들을 볼까요. 홍콩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A기업 대표의 경우 홍콩이 아닌 다른 나라에 수출하면서 홍콩의 페이퍼컴퍼니를 거쳐서 거래하는 방식으로 차익을 홍콩에 남겨뒀습니다. 이 돈은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됐고, 대표의 비자금으로 쓰였습니다. 횡령이죠.
또 버진아일랜드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B사 사주는 해외자원개발을 하겠다며 회삿돈을 빼돌린 후에 있지도 않은 유령회사의 지분을 사들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리곤 이것을 다시 고가에 팔아넘긴 척 해서 유령회사에 숨겨두고 개인돈으로 썼습니다.
최근 역외탈세에 대한 감시활동은 크게 강화되고 있는데요.
2013년부터 10억원 이상의 해외금융계좌를 국세청에 신고하도록 의무화됐고요. 매년 역외탈세자 수백명을 표적으로 세무조사도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국세청은 지난해에만 223명을 조사해 1조2861억원의 세금을 추징했습니다.
지난 3월말까지 이른바 역외재산소득 자진신고제도도 시행했는데요. 스스로 신고할 경우 가산세와 형사처벌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일종의 '고해성사' 기간이었습니다.
문제는 결과가 신통치 않다는 건데요. 정부에서는 공식적인 신고 통계를 아직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기대했던 4조원의 세수확보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이번에 신고 안하면 큰일 날거라는 경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설마 걸리겠느냐는 도둑들의 배짱이 더 컸다는 얘기죠.
다행히 이들을 잡으려는 과세당국의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잡힐 수 있다는 얘기죠. 미국과의 국가간 금융정보자동교환협정이 올해 안에 발효될 것으로 보이고요. 미국 외에 51개국이 참여한 다자간 금융정보자동교환 협정도 발효됐습니다. 세금을 제대로 걷겠다는 각국 정부의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거죠.
수백억 혹은 수천억원의 탈세를 하고도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는 양심없는 부자들이 여전히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세상인데요. 모쪼록 국내에서 묵묵히 일하고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는 납세자들을 위해서라도 역외탈세가 엄중히 처벌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