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화장품 업계 분위기는 '중국 내 럭셔리 브랜드 판매 호조와 국내외 로드숍 부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는 했지만 변화의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으면서 더욱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럭셔리 브랜드의 선두주자로 올라선 '더 히스토리 오브 후(이하 후)'는 말 그대로 돌풍을 일으키며 LG생활건강을 국내 화장품 업계의 확고한 1위로 끌어올렸다. 반면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럭셔리 브랜드인 '설화수'의 호조에도 이니스프리 등 로드샵 브랜드의 부진 탓에 영업이익이 2년 만에 반 토막 났다.
두 업체의 행보가 엇갈린 만큼 이들 앞에 놓인 과제도 다르다. LG생활건강은 후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를 낮추는 게 관건이다. 후의 인기를 이어가면서도 그 뒤를 이를 차기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구조조정 등으로 로드숍의 부진을 해결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 LG생건 '최고의 한해' vs 아모레 '2년째 내리막'
LG생활건강은 지난해 여러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그야말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LG생활건강의 지난해 연간 매출은 전년보다 10.5% 늘어난 6조 7475억원, 영업이익은 11.7% 증가한 1조 393억원을 기록했다. LG생활건강이 연간 영업이익 1조원을 넘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4분기엔 화장품사업부 최초로 분기 매출 1조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LG생활건강의 호실적을 이끈 건 럭셔리 화장품 브랜드인 '후'다. 후는 지난 2016년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한 지 2년 만에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2조원을 뛰어넘는 저력을 과시했다.
후는 특히 중국 내 고가 화장품 수요가 급증하는 흐름을 타고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후는 지난해 중국 현지에서 전년보다 40% 이상 성장했고, 따이공(중국인 보따리상) 위주의 면세점에서도 30%가 넘는 성장세를 나타낸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LG생활건강과 함께 국내 화장품 업계를 이끄는 아모레퍼시픽그룹은 하락세를 이어갔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지난해 연간 매출은 6조 782억원으로 전년보다 1% 증가하는 데 그쳤고, 영업이익의 경우 5495억원으로 25%나 감소했다. 지난 2016년 1조원을 넘겼던 영업이익은 2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아모레퍼시픽은 매출이 전년보다 3% 증가하며 계열사 중 나 홀로 성장했다. 아모레퍼시픽 역시 중국의 고가 화장품 선호 추세 덕분에 설화수 등의 럭셔리 브랜드가 매출 성장을 이끌었다. 반면 아모레퍼시픽 내 아이오페나 라네즈, 려, 미쟝센 등 중저가 브랜드의 매출은 감소했다.
이니스프리나 에뛰드 등의 다른 계열사들은 화장품 로드숍 채널의 부진으로 타격을 입었다. 이니스프리의 매출은 전년보다 7% 줄었고, 영업이익은 25% 감소했다. 에뛰드 역시 매출이 16% 줄었고, 영업이익은 적자전환했다.
중국 소비자들의 수요는 럭셔리 브랜드로 쏠리고 있고, 국내에선 헬스앤뷰티(H&B) 스토어와 온라인 등으로 수요가 분산되면서 악재가 겹친 탓이다.
◇ '후' 인기 언제까지?…차세대 브랜드 발굴 과제
실적이 분명하게 엇갈린 만큼 두 업체가 올해 풀어야 할 과제 역시 다르다. 우선 LG생활건강은 후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단일 브랜드인 후가 LG생활건강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달한다. 시장에선 당분간 후의 인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지만 차세대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LG생활건강 내부에서도 '숨'과 '오휘' 등을 명품 브랜드로 키우려고 공들이는 분위기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침체가 이어지고 있는 로드숍이 가장 큰 숙제다. 특히 이니스프리의 경우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역성장한 데다 영업이익률이 2011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어닝쇼크'를 기록하면서 점포 구조조정이나 브랜드 리뉴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은경 삼성증권 연구원은 "이니스프리는 중국인의 럭셔리 브랜드 선호 현상으로 중국 현지 및 면세점 매출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며 "전반적인 브랜드 노후화의 문제도 대두되고 있어 고객 이탈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아모레퍼시픽 역시 설화수의 뒤를 이을 '히트작'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설화수의 경우 지난 2015년 국내 단일 화장품 브랜드로는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달성했지만 이후 '후'에 밀리며 성장세가 다소 꺾인 분위기다. 설화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 유지되긴 하겠지만 새 성장 동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역시 올해 신년사를 통해 이 과제를 강조하기도 했다. 서 회장은 "우리 브랜드만이 지닌 특이성을 바탕으로 매력적인 혁신 상품을 키워내야 한다"며 "최초이자 최고의 세계 일류상품, 남들은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