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그룹이 30일 전격적으로 '계열분리'를 선언했다. 이날 정기 임원인사로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이 회장으로 승진, 그룹 내에 두 명의 회장이 공존하게 되면서 계열분리는 시간 문제가 됐다. 이미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과 정유경 회장 사이의 지분 정리가 끝난 상황인 만큼 신세계그룹은 조만간 계열분리를 위한 법적 절차를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두 번째 계열분리
신세계그룹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이 삼성그룹에서 독립하며 만들어졌다. 이명희 총괄회장은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막내딸이자 고 이건희 회장의 동생으로, 1979년 삼성그룹이 운영하던 신세계백화점에 입사하며 백화점 경영에 뛰어들었다.
그는 19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2년 뒤에는 서울 도봉구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을 내며 대형마트 사업을 시작했다. 1997년 공정거래법상 계열분리에 성공하며 삼성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이후 신세계그룹은 이마트와 백화점 사업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삼성그룹에서 독립할 당시에는 백화점 두 곳과 조선호텔 한 곳뿐이었으나 현재는 그룹 전체 매출 약 71조원(지난해 기준) 규모의 국내 굴지의 유통기업이 됐다. 신세계그룹의 공정자산총액은 약 62조원으로 재계 11위권이다.
이명희 총괄회장의 자녀들도 일찍 경영에 참여하며 힘을 보탰다. 정용진 회장은 1995년 말 신세계 전략기획실 대우이사로 그룹에 입사한 후 대형마트 사업을 이끌어왔고, 정유경 회장은 1996년 조선호텔 상무로 입사한 후 그룹 백화점, 패션 사업을 맡아왔다.
이 같이 남매가 본격적으로 그룹 사업을 분리해 맡은 것은 2011년부터다. 신세계그룹은 2011년 신세계와 이마트를 별도 법인으로 분할했다. 신세계그룹 내에는 별도 지주사는 없지만 현재 두 회사가 사살상 지주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마트 아래에 슈퍼, 편의점, 호텔, 건설 사업 등을 두고, 신세계 아래에 패션, 아울렛, 면세점 등을 두는 식이다. 이때부터 이명희 총괄회장이 두 남매에게 그룹을 분할해 넘기는 방안을 준비한 셈이다.
긴 사전 작업
신세계그룹 오너가는 이후 각자 보유한 계열사 지분을 정리하면서 정용진·정유경 회장 남매의 분리 경영 체제를 구축, 강화해왔다.
정용진·정유경 회장은 지난 2016년 각자 보유 중이던 신세계와 이마트 지분을 맞교환 하며 사실상 남매 분리경영을 선언했다. 당시 정용진 회장은 신세계 지분 72만203주(7.31%)를 정유경 회장에게, 정유경 회장은 이마트 지분 70만1203주(2.52%)를 정용진 회장에게 넘겼다. 이 지분 교환으로 정용진 회장이 가진 신세계 지분과 정유경 회장이 보유한 이마트 지분은 각각 '0'이 됐다.
이어 정유경 회장은 2018년 부친인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신세계인터내셔날 지분 150만주(21.01%)를 증여 받았으며, 같은해 7월 정 명예회장과 정용진 회장으로부터 각각 신세계인터내셔날 지분 0.68%와 0.11%를 넘겨받았다. 이마트는 같은 시기 이명희 총괄회장과 정재은 명예회장, 정용진 회장이 보유한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 등의 계열사 지분을 사들였다.
또 이명희 총괄회장은 지난 2020년 자신의 이마트·신세계 지분 8.2%씩을 정용진·정유경 회장에게 각각 증여했다. 정용진·정유경 회장의 각 회사 지분율은 18.5%가 되면서 최대주주 지위에 올랐다. 2021년에는 정용진 회장이 자신의 광주신세계 지분 52.1%를 신세계에 양도했다.
이와 함께 신세계그룹 차원에서도 2019년 백화점부문과 이마트부문을 신설, 계열분리를 위한 사전 준비를 시작했다. 계열사간 사업을 양도하는 등의 지배구조 개편도 진행했다. 신세계백화점이 운영하던 프리미엄마켓 'SSG 푸드마켓'을 이마트에 양도하고, 스타필드를 운영하는 신세계프라퍼티 지분을 신세계가 이마트에 넘겼다.
이를 통해 현재 신세계그룹 이마트부문과 백화점부문은 서로 얽혀있는 지분 관계를 대부분 정리했다. 현재 이마트와 신세계가 함께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는 SSG닷컴(이마트 45.6%, 신세계 24.4%)이 유일하다.
남매 시대 개막
이렇게 10년 이상 계열분리를 준비해온 신세계그룹이 이날 전격적으로 계열분리를 선언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신세계그룹은 이날 정유경 회장 승진 인사를 발표하며 "계열 분리의 토대 구축을 위한 인사"라며 "이번 인사를 시작으로 향후 원활한 계열 분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역량을 모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이 총괄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정용진·정유경 회장 남매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정 회장 남매가 일찍부터 경영 일선에 나서긴 했으나 신세계그룹은 여전히 이명희 총괄회장의 리더십 아래에 놓여있었다. 신세계그룹의 총수(동일인)도 아직 이명희 총괄회장이다. 1943년생인 이명희 총괄회장이 이미 80대에 들어선 만큼 계열분리를 통해 두 회장 남매에게 경영을 완전히 일임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이마트와 백화점 부문이 모두 올해 긍정적인 실적을 내고 있는 점도 계열분리를 선언할 명분을 마련해줬다. 실제로 신세계그룹은 "올해는 백화점이 상반기까지 사상 최대 매출을 이어가고 있다"며 "이마트 역시 본업 경쟁력 강화라는 핵심 화두를 바탕으로 수익성 개선이 본격화되고 있어 올해가 계열 분리를 통해 성장의 속도를 한층 더 배가시킬 수 있는 최적기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신세계그룹 승계를 위한 마지막 절차로는 이명희 총괄회장이 보유한 지분 증여가 있다. 이명희 총괄회장은 현재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 10%씩을 보유하고 있다. 이 지분들 역시 각각 정용진·정유경 회장에게 넘겨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신세계그룹이 계열분리를 공식화 한 만큼 조만간 공정거래위원회에 친족독립경영을 신청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위 친족독립경영 인정 요건에는 기업집단간 상장사는 3%, 비상장사는 10% 미만의 지분을 보유해야 한다는 지분보유율 요건이 있다.
이마트와 신세계는 SSG닷컴 이외에는 공동으로 보유한 회사가 없다. SSG닷컴의 경우 신세계가 보유한 지분을 이마트에 양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외에 기업집단간 임원을 겸임하는 사람이 없고 채무보증과 자금대차가 없어야 한다는 요건이 있는데 이 역시 무난히 충족할 가능성이 크다.
신세계그룹이 계열분리에 성공하면 각 기업집단의 총수에는 정용진·정유경 회장이 오르게 된다. 계열분리에 앞서 두 회장이 이마트와 신세계의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릴지도 관심사다. 정용진 회장은 물론 정유경 회장도 현재 두 회사의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