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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의 보험 인사이트]신뢰할 수 없는 말의 향연

  • 2021.03.30(화) 09:30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교수였던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정문에 '95개조 의견서'를 내걸었다. 우리는 이를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사건으로 기억한다. 개혁은 이전 것의 잘못을 전제한다. 중세 교회는 부당한 면죄부 판매로 상징된 올바르지 못한 권력의 중심이었다. 교회와 성직자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성경의 독점에 있다. 라틴어로 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소수의 권력이 성직자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신의 말을 전하는 중재자'로서 권력을 독점했다. 라틴어를 읽을 수 없었던 대다수의 민중은 성직자를 통하지 않으면 신의 뜻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성직자의 말은 곧 신의 말이자 권력이 되었다.

중세 교회의 구조적 문제를 타파하여 성직자의 독점적 권력을 붕괴시킨 것이 종교개혁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중심은 루터의 '95개조 의견서' 게시가 아니다. 이 의견서도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종교개혁을 폭발시킨 힘은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의 등장에 있다. 성직자가 없어도 누구나 직접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성경은 쿠텐베르크 인쇄기로 대량 인쇄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스스로 신의 뜻을 읽을 수 있는 교인이 늘어나면서 폭발하게 된다. 라틴어를 독점한 성직자의 말에 기대지 않고도 신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기에 독점적 권력을 이용하여 부당한 명목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의 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021년 한국 보험 모집 시장에는 500년 전 중세 교회가 지닌 문제가 반복된다. 금융 민원 중 과반 이상을 보험이 차지하는 구조적 원인은 믿지 못할 누군가의 말에 기대 상품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참고점이 잘못되었기에 아무리 공을 들여 상담을 해도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다. 모집 시장에서 신계약의 대다수는 보험 설계사를 통해 체결된다. 그런데 설계사가 고객에게 전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아침 조회 시 전파되는 교육을 통해 생산된다. 하지만 자주 잘못된 기준을 따르거나 근거 없는 말이 통용된다.

예를 들어 최근 각 손해보험사에서 12대 중과실을 원인으로 발생한 교통사고로 가해자가 공소제기된 경우 피해자인 피보험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특약이 연달아 출시되고 있다. 납입 보험료 대비 보험금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기에 이를 중심에 둔 활동이 활발하다. 그런데 설계사 SNS를 보면 '교통사고 나면 ***만원 무조건 지급', '의사 얼굴만 봐도 보험금 얼마' 등의 자극적인 문구가 보인다. 모집 시장 경쟁이 치열하고 신계약을 체결해야 모집 수수료를 받는 상황은 이해되지만 잘못된 상품 설명 자료를 SNS에 게재하는 것은 분명 문제다. 누군가 잘못된 자료를 만들어 공유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급속하게 전파된다.

유사하게 운전자보험의 신설 특약을 홍보하기 위해 해당 보험종목과 자동차보험을 비교하는 자료의 게재도 증가하고 있다. 자동차보험 보통약관에는 '자기신체사고'가 있다. 하지만 자주 자기신체사고를 '자기신체손해'라고 잘못 표기한 자료가 보인다. 자동차보험 어디에도 자기신체손해라는 약관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약관만 확인해도 바로 잡을 수 있는 실수가 반복되는 것은 소비자 신뢰를 훼손하기에 심각하다. 살펴 본 것 이외에도 다양한 근거 없는 말이 소비자를 현혹시킨다. 문제는 설계사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근거가 되는 약관과 관련 법령을 찾아 읽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약관은 보험사나 계약자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설계사 모두에게 성경과 같은 존재다. 거기에 적혀있는 계약 조건이 곧 보험금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약관을 읽지 않는 관리자와 설계사가 너무 많다. 이들은 신뢰할 수 없는 누군가의 잘못된 말에만 기대 허망한 구원을 믿는 사이비와 같다. 또한 이런 불행은 전문가라 치장된 설계사를 믿고 계약을 체결한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이 500년 전 루터의 '95개조 의견서'와 겹쳐 보이는 이유는 잘못된 말에 근거한 부당한 상품 모집 행위를 근절시킬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대중은 라틴어를 몰랐기에 독일어 번역 성경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 약관이 존재한다. 계약자와 설계사 모두 스스로를 지키고 보험 계약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도 누군가의 말이 아닌 약관이 전하는 그대로를 확인해야 한다. 사고 후 보험금이란 구원의 약속은 약관에 존재한다.

<김진수 인스토리얼 대표 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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