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와 경기 부진으로 대출 연체가 증가하면서 저축은행들의 부실 채권이 급증하는 모양새다. 금융당국은 저축은행들의 건전성 관리를 위해 지난 7월 무담보 연체 채권을 부실채권(NPL) 민간 투자사에 매각할 수 있는 길이 열어줬지만 저축은행들의 부실채권 정리 작업은 4개월째 제자리걸음이다.
가격, 방식 등을 놓고 저축은행과 NPL 투자사간 견해차가 컸기 때문이다. 이에 저축은행 업계는 민간 NPL 업체와의 견해를 좁히기 위해 '다자 매각' 방식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자 매각 방식이 결정되면 저축은행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부실채권 정리 작업이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말 기준 79개 저축은행의 고정이하여신(NPL) 잔액은 총 6조1330억원으로 1년 새 60.5%(2조3111억원)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최근 5년내 가장 큰 규모다. 79개사 평균 고정이하여신(NPL) 비율도 5.98%로 작년 상반기말(4.27%)보다 1.71%포인트 상승했다.
고정이하여신은 연체 기간이 3개월 이상인 부실채권을 말한다. 고정이하여신비율이 높을수록 건전성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이런 부실채권 증가로 저축은행들의 연체율은 고공행진 중이다. 올해 상반기말 저축은행 연체율은 5.33%로 지난해말(3.41%) 대비 1.92%포인트 올랐고, 지난 1분기(5.1%)보다도 상승했다.
저축은행들의 부실채권이 계속해서 급증하는 모습을 보이자 금융당국은 지난 7월 개인 무담보 연체채권을 민간 NPL 업체에 매각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줬다. 연체채권을 인수할 민간 투자사로는 우리금융F&I·하나F&I·대신F&I·키움F&I·유암코 등 5개사가 선정됐다.
저축은행 연체 채권은 2020년 6월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 차주에 대한 불법 및 과잉 추심을 예방을 위해 캠코에만 매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체 채권 매입 회사가 캠코 한곳이다 보니 가격 경쟁이 없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부실채권 매각 통로가 캠코로 한정되자 매입 가격이 시장가 대비 30~50% 수준으로 낮아졌다. 부실채권을 팔지 않고 보유하는 저축은행이 늘어나면서 자산건전성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저축은행 건전성 악화로 금융당국이 NPL 매각 주체를 민간 회사로 넓히기를 허용하자 저축은행업권에서는 채권 정리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저축은행업계와 NPL 투자사들은 지난 7월 첫 만남을 가진 이후 현재까지 NPL 매각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실채권 매각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가격과 방식에 대한 이견이었다. 저축은행은 더 높은 가격을, NPL 투자사는 이보다 낮은 가격을 부르고 있다. NPL 민간 회사들이 매입을 망설이는 배경에는 지금껏 개인 무담보 채권을 다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축은행의 부실채권을 인수하더라도 채권추심을 신용정보사에 위탁해야 하고 제3자 재매각이 금지돼 큰 이익을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저축은행들이 매각을 원하는 것은 개인신용채권인데, NPL 민간 회사들은 그동안은 부동산담보 중장비 관련 채권만 매입했지 개인 신용채권에 대한 매입은 진행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처음 진행되는 일이기 때문에 협의가 잘 안돼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관련 저축은행중앙회는 지난 12일 개인 무담보 연체채권 매각을 논의하기 위해 개별 저축은행과 민간 NPL 업체간 회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중앙회는 여러 저축은행의 연체채권을 특정 규모 이상으로 묶어서 다수의 NPL 업체에 파는 다자 매각 방식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자 매각 방식이 거론된 이유는 금융당국이 선정한 5개의 NPL 민간 투자사가 최소 1000억원 이상의 대규모 채권 매입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산 규모가 작은 중소형 저축은행의 경우 연체채권을 매도하려고 해도 1000억원 넘는 규모로 매각할 여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 저축은행도 NPL 업체에 원하는 가격으로 연체채권을 팔아넘길 수 없다고 판단해 대규모 매각은 꺼리는 것으로 풀이된다.
만일 다자 거래가 가능해지면 저축은행 연체채권 매각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규모 문제가 해소돼도 가격을 두고 견해 차이가 여전해 매각이 활발히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특히 NPL 업체는 저축은행으로부터 연체채권을 매입해도 직접 추심을 하거나 제3자에 재매각할 수 없도록 규제를 받고 있다. 금융당국이 과잉 추심 우려로 인해 대부업체 매각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저축은행 관계자는 "매각이 안 된다기보다는 서로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가는 단계"라며 "캠코에만 매각하기에는 손실 폭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접점을 찾게 되면 결국 매각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