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반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본금을 모두 까먹었을 정도로 부실하기 짝이 없던 오너 일가 소유의 기업이 계열사 주식으로 이전과는 180도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어서다. 채형석(58)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일가(一家)의 애경유지공업 얘기다.
애경유지공업은 1954년 6월 설립된 애경의 모태(母胎)다. 원래는 비누·세제 등을 만들던 생활용품 업체지만 1985년 기존 사업을 애경산업에 넘긴 뒤로는 본체 사업이라고는 1993년 9월 오픈한 백화점 AK플라자 구로본점 운영이 전부다.
하지만 애경 지배구조 측면에서 보면 애경유지공업의 입지는 막중하다. 애경산업을 비롯해 애경의 지주회사 노릇을 해왔다. 2012년 9월 애경이 옛 애경유화 인적분할을 통해 AK홀딩스(존속법인)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된 뒤로도 애경유지공업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다.
애경유지공업은 줄곧 채 부회장 일가 소유였다. 애경 36개 국내 계열사 중 채 부회장 일가가 지분 100%를 소유한 유일한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지주회사 울타리를 벗어나 있으면서도 AK홀딩스의 단일 2대주주로서 오너 일가의 지배기반을 견고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AK홀딩스의 대주주 소유지분은 현재 64.8%다. 1대주주인 채 부회장(16.1%)을 비롯해 일가(13명)가 45.9%를 가지고 있고, 이외 18.9%가 2개 계열 주주사 소유다.
이 중 한 곳이 애경유지공업이다. 보유지분도 9.7%나 된다. 지분 9.2%를 소유한 골프장(경기 곤지암 중부CC) 운영업체 애경개발의 경우도 최대주주(31.5%) 애경유지공업과 채 부회장 일가(68.5%)가 지분을 전량 소유한 점을 감안하면, 애경유지공업은 오너 일가의 ‘믿는 구석’이라고 할 수 있다.
▲ 채형석 애경 총괄부회장 |
◇ 빚에 발목 잡혀온 애경유지공업
이와 맞물려 재무구조가 흥미롭다. 지배구조 측면의 존재감에 비해 돈벌이는 한참 못미쳐온 와중에 최근에는 돈 되는 계열사 주식 덕에 수익을 내고 있어서다.
애경유지공업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반까지 수익성이 변변치 않았다. 무엇보다 본체에서 뛰어든 백화점 사업 탓이다. 업종 특성상 초기 투자금이 대거 투입됐고 이익을 내야 할 시점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좀처럼 실적을 내지 못했다.
1999~2001년 재무실적(연결기준)을 보면 백화점 사업 적자를 주력사인 애경산업이 메워주면서 영업이익은 비록 연평균 82억9000만원 흑자를 냈지만 순익은 많게는 471억원, 적게는 48억3000만원 적자를 기록했다. 빚에 허덕인 탓이다.
애경유지공업은 1999년 말 유동부채(3110억원)가 유동자산(2360억원)보다 744억원 더 많은 상태였다. 1999년 백화점 AK플라자 구로본점 부지 및 건물을 당시 관계사 애경리얼티개발에 2177억원에 매각한 것도 빚을 갚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차입금 부담이 만만치 않다보니 2011년 이자로만 94억8000만원(순이자비용)이 빠져나갔다. 이에 따라 1999년 말 첫 결손금 발생 이래 2011년 말에는 362억원으로 확대됐다.
2002~2007년까지는 나름 괜찮았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갚고도 남아 많게는 167억, 적게는 18억9000만원 6년연속 순익흑자가 지속됐던 때다. 문제는 2008년부터다. 2013년까지 이전과는 180도 딴판이다. 적게는 151억원, 많게는 451억원 6년연속 대규모 적자 흐름이 이어졌다.
◇ 돈 되는 계열사 주식으로 잠식 메우기
우선 2007년 3월 ARD홀딩스(현 AK에스앤디)를 통해 삼성물산의 경기 분당 삼성플라자(현 AK PLAZA 분당점) 및 삼성몰(현 AK Mall)을 4870억원에 인수하는 과정에서 외부차입금이 대폭 증가했다.
2006년 말 4380억원 수준이던 총차입금이 2012년 말 9890억원으로 불어났을 정도다. 이렇다보니 2006년 156억원 수준이던 순이자비용은 2009년 이후로는 4년간 해마다 500억원을 넘어섰다.
면세점 사업도 적잖은 부담을 줬다. 애경유지공업은 AK글로벌을 통해 2001년 3월 인천공항점을 시작으로 김포공항점, 코엑스점(AK리테일) 등 연쇄적으로 면세점 사업을 확장해왔지만 2008년 이후 급속하게 부실해졌다.
AK글로벌은 2008년 448억원, 2009년 410억원 순익적자가 발생, 41.1%(자본금 600억원·자본총계 354억원)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애경유지공업의 손실로 잡힐 수 밖에 없없었다. 2010년 7월 2000억원의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800억원만 받고 AK글로벌을 롯데에 넘긴 이유다.
야심차게 시작한 주택사업에도 발목이 잡혔다. 2006년에 설립한 부동산 개발 시행사 애경PFV1를 통해 대구 달서구 유천동에서 애경그랑폴리스 아파트 분양 사업을 했지만 아무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애경PFV1은 2010~3013년 순익적자만 총 1320억원에 달했다.
이렇다보니 애경유지공업은 2007년 말 171억원 정도였던 결손금이 2013년 말 1360억원으로 확대됐고, 완전자본잠식(자본금 519억원·자본총계 –24억5000만원) 상태에 빠졌다.
애경유지공업이 제주항공 주주로 등장한 것은 이런 와중에 나왔다. 2015~2016년 각각 각각 66억9000만원, 46억7000만원 영업적자 속에서도 순익은 한 해 평균 197억원 3년 연속 흑자기조를 유지하며 자본잠식 규모를 83억7000만원(2016년 말 자본금 519억원·자본총계 436억원)으로 줄인 배경 중 하나다.
면세점 매각 등으로 차입금 축소(2016년 말 총차입금 1800억원)로 이자로 빠져나가는 돈(2016년 71억5000만원)으로 줄어든 영향도 있지만 애경산업(2014년·매각지분 29.9%·매각금액 249억원), 네오팜(2016년·4.3%·113억원) 외에 제주항공 출자지분으로 어마무시한 차익을 챙긴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