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SK이노베이션-SK E&S 합병안' 의결을 시작으로 그룹 내 리밸런싱 작업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르면 오는 11월 중 자산 100조원 규모의 '에너지 공룡'이 탄생할 전망인데요. 양사 합병비율은 '1대 1.1917417'로 정해졌습니다. 시장 예상치를 고려했을 때 SK E&S보다 SK이노베이션의 가치를 높게 쳐준 셈입니다.
이는 SK이노베이션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염두에 둔 결정으로 읽힙니다. SK E&S는 비상장사인데다, ㈜SK가 지분 90% 이상을 보유한 최대 주주여서 허들을 넘기에 비교적으로 수월하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다만 SK E&S의 재무적 투자자 설득이 관건입니다. SK E&S 기업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 상환우선주로 3조원 이상을 투자한 사모펀드가 반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결국 알맹이는 '배터리 일병 구하기'
지난 17일 SK이노베이션과 SK E&S는 각각 이사회를 열고 양사 간 합병 안건을 의결했습니다. 합병안이 오는 8월 27일 주주총회에서 승인되면 합병법인은 11월 1일 공식 출범합니다.
양사 합병이 최종 확정되면 자산 100조원, 매출 88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에너지 기업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국내를 넘어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민간 에너지 기업 자리에 오르게 되죠.
SK이노베이션은 합병을 통해 오는 2030년 기준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20조원 규모 달성을 목표로 합니다. 합병 시너지 효과는 연간 EBITDA 2조2000억원에 달할 전망입니다.
이사회 이튿날인 18일 박상규 SK이노베이션 사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미래 에너지 사업의 성장기반을 만들고 과감한 구조적 혁신을 추진하기 위해 SK E&S와의 합병을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번 합병은 향후 5~10년을 내다보고 추진했고 양사 역량을 결합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상당한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급변하는 대내외 경영환경을 감안, 두 회사의 통합이 주주가치 증대와 에너지 산업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합병은 SK그룹이 올해 초부터 추진해온 사업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방안 중 하나입니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 내 비전도 주요 배경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배터리 사업을 영위하는 SK온의 자금난 해결이 주된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SK온은 공장 설립에 조 단위 대규모 투자를 계획했지만 10개 분기 연속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 탓에 흑자 전환 시점도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모회사 SK이노베이션은 이번 합병을 통해 기초체력을 강화, 추가 투자 여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입니다.
전유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알짜 민자 발전사인 SK E&S는 연간 약 1조2000억원에서 1조5000억원 내외의 영업이익을 창출하는 만큼 양사 합병 이후 SK E&S가 SK온의 자금처가 되어줄 수 있다"며 "SK이노베이션 입장에선 지금까지 해왔던 자산 매각 또는 유상증자 등을 통한 SK온 자금 지원 필요성이 사실상 해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지난 17일 SK이노베이션이 3개 자회사 'SK온-SK트레이딩인터내셜-SK엔텀' 합병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기준 SK트레이딩과 SK엔텀은 영업이익으로 각각 5700억원, 500억원을 냈는데요. 우선 SK온은 이를 통해 배터리 사업 조기 정상화를 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KKR 조기상환 청구 복병…SK이노 "우호적 협상중"
가장 관심을 모았던 합병비율은 '1대 1.19' 수준으로 산출됐습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가치를 비슷하게 본 셈인데요. 기존 시장 전망치는 1대 2 혹은 1대 1.5 수준이었습니다. 이에 증권가에선 "SK E&S 적정(예상) 시가총액을 낮게 잡음으로써 결과적으로 SK이노베이션 가치를 훨씬 높게 봤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이진호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결정된 합병비율은 시장 예상치보다 SK이노베이션에 더욱 유리한 방향"이라며 "SK E&S의 지분 90%를 보유한 ㈜SK가 이번 합병서 SK온을 지원하는 데 포커스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습니다. SK E&S에 3조원 이상을 투자한 사모펀드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를 어떻게 설득하느냐 입니다. 앞서 KKR은 SK E&S가 발행한 상환전환우선주(RCPS) 3조1350억원을 인수한 바 있는데요.
가장 우려되는 건 KKR이 SK E&S 기업 가치가 저평가된 데에 반발해 RCPS 조기상환을 청구할 경우입니다. 합병 기일 전 상환권을 청구하면 SK E&S는 연내 3조9000억원 내외의 자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에 대해 전 연구원은 "이번 합병비율은 RCPS 전량이 전환돼 소멸되는 것을 전제로 산정된 만큼 전환권이 행사되지 않을 경우 합병비율 또는 합병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 "KRR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현재 SK이노베이션 측은 KKR과 물밑 협상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날 박상규 사장은 KKR 반대 가능성에 대해 "우호적 분위기에서 방향을 찾고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서건기 SK E&S 재무부문장도 "기존 발행 취지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협의 중"이라며 "합병 법인에 부담이 되진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과연 SK의 설명대로 KKR이 이번 합병안을 받아들일까요? SK가 마지막 허들인 KKR을 넘어 '에너지 공룡'을 순조롭게 탄생시켜 당초 계획대로 SK온을 지원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