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조성자의 시장교란 논란이 금융투자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가운데 국내 증권사 3곳은 시장조성자로 참여해 거래소 규정을 지키면서 자본시장법도 위반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거래소 규정을 지키면 자본시장법 위반이고, 자본시장법을 지키면 거래소 규정을 어기게 된다는 증권사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여서 주목된다.
칼날 피한 NH·KB·메리츠…이유는?
1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NH투자증권, KB증권, 메리츠증권 세 곳은 시장조성 증권사임에도 이번에 금융감독원의 칼날을 피했다. 이들은 지난해 코스피 종목에 대해서만 시장조성계약을 맺고 코스닥 종목에 대해선 시장조성행위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과징금 폭탄을 맞은 나머지 9개 증권사(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 한화투자증권, 신영증권, 부국증권, 골드만삭스, SG, CLSA)와 이들 세 곳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전체 주문 대비 취소·정정 주문의 비중이다.
금감원은 대다수 시장조성 증권사가 시장조성행위를 하면서 전체 주문 대비 취소·정정 주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했던 데 반해 NH투자증권·KB증권·메리츠증권의 경우 적정 비중을 유지하면서 시장교란을 하지 않았다고 봤다.
3초마다 매수·매도만 수천 번
이번 시장조성자의 시장교란 혐의는 앞서 금감원의 통상적인 시장모니터링 과정에서 처음 발견됐다. 모니터링 중 특정 대형 종목에서 3초 간격으로 매수·매도와 정정·취소 등 폭발적인 주문이 30분가량 지속된 것이다.
주문을 넣었던 곳은 한 외국계 증권사로, 해당 증권사는 시장조성 명목으로 이 같은 주문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금감원은 이 증권사가 다른 종목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빈번한 주문을 하는 것을 파악하고 이후 시장조성 증권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시장조성 증권사가 한국거래소와 시장조성 계약을 맺고 있는 여러 종목에서 전체 주문 대비 취소·정정 주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각 증권사가 특정 종목에 제출한 주문 중 취소·정정 비율이 95%를 넘어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금감원은 시장조성 증권사 대부분이 시장조성이 필요 없는 고유동성 종목에 집중적으로 시장조성 행위를 하고 저유동성 종목에 대해선 빈번한 취소·정정주문을 해 오히려 가격 발견 기능을 저해했다고 판단했다.
실제 금감원 조사 결과 일부 증권사는 가격 체결 가능성이 높은 '최우선 지정가'에서 멀리 벗어난 호가를 주문해두고 거래소 규정상 호가 유지 의무 준수를 위한 일정 시간을 채운 뒤 거래를 취소하는 방식을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감원은 이 과정에서 일부 시장조성 증권사들이 '알고리즘'을 통한 매매도 진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거래가 체결되지 않을 정도로 주문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등 거래소 규정에 따른 최소한의 시장조성 의무만 지키도록 설계했다는 추론이다.
위반 종목마다 과징금 부과
취소·정정 주문을 많이 한 증권사들은 눈덩이 과징금을 물게 됐다. 특히 전체 행위가 아닌 종목별로 각각의 과징금이 부과된 탓에 규모가 더 커졌다. 9개 증권사에 부과된 과징금 규모는 총 480억원으로, 각 증권사별로 적게는 10억원에서 많게는 90억원대에 달하는 금액을 사전 통보받았다.
시장조성자에 시장교란 혐의로 과징금을 부과한 첫 사례인 만큼 금감원의 과징금 부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금감원은 이번 과징금 부과에 있어 자본시장조사업무 규정과 금감원 감독 규정을 근거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현행 자본시장조사업무규정에는 시장교란 행위와 관련해 자본시장법 위반 기간 중 해당 종목의 전체 주문 대비 허수 호가 비중에 따라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기준이 명시돼 있다. 허수 호가 비중별로 10% 이상인 경우는 중요도 '상', 5% 이상 10% 미만인 경우 '중', 5% 미만인 경우 '하'로 평가해 과징금을 부과한다.
다만 해당 규정에서의 허수 호가 비중은 특정 종목에 대한 전체 주문(기관, 외국인, 개인 등 모든 투자자의 주문)중 혐의자가 제출한 허수호가 비중을 말한다. 특정 종목에 대해 개별증권사가 낸 전체 주문 중 취소·정정 주문 비율과는 다르다.
"과한 잣대…제도 무너질 것"
이와 관련해 금융투자업계는 일반적인 자본시장 교란 혐의와 허수 호가 비중에 따른 과징금 부과 기준을 시장조성 증권사들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장조성을 위해 빈번한 호가 제시는 불가피한 만큼 일반투자자들과는 기준을 달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이들은 제재에 앞서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도 고수하고 있다. 애당초 시장조성자 제도 내 취소·정정 주문 비중에 대해 비율 제한 상한선을 두거나 추후 해당 내용을 담은 규정 개정 등 구두 경고가 있었다면 이를 위반할 증권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시장조성자들은 주식의 원활한 거래 체결을 위해 호가를 빈번히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일반적인 기준을 시장조성자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적극적으로 시장조성자로 참가할 곳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