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전환사채(CB)를 저가에 총수일가에게 발행한 뒤 총수일가의 지분율이 기존 0%에서 63%로 크게 늘었다면 이는 일반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일까?
지금 이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의 주식시장 참여자는 소액주주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특정 집단에 저가에 주식을 발행, 지분율을 높일 수 있도록 한 것은 분명히 다른 보통의 주주를 차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위 질문은 지난 1996년 있었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이다.
하지만 지난 2009년 우리나라 대법원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 사건'에 대해 기존 주주들 간의 문제일 뿐 회사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또 주식회사의 이사(상법상 이사회 구성원)는 회사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지만 개별 주주들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했다.
주식투자자가 늘어나고 소액주주 권리보호 필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제는 에버랜드 사건처럼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사가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상법개정안 통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과 박주민 의원의 공동주최로 11일 열린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 토론회'에서는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넣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비례적 이익'이란 대주주, 소액주주 모두 각자의 주식 1주당 가치를 보호한다는 뜻을 담은 개념이다.
현행 상법 제382조의3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조항에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들어가 있지 않다.
토론회 발제를 맡은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LG화학 물적분할로 소액주주 피해가 크다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변호사들 가운데 이 문제를 소송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며 "상법에 주주보호 의무가 없고 판례조차 주주보호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소액주주보호 의무규정이 없어 나타나는 문제는 많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이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비율 논란 등에서도 법원 판단은 모두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의 물적분할 사례뿐만 아니라 주식공개매수 시 배당성향을 낮춰 주가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행위, 합병 시 주주에 불리하게 합병비율을 산정, 빈번한 전환사채·신주인수권부사채 등 발행, 인수합병(M&A)때 최대주주만 경영권 프리미엄을 받고 주식을 파는 것 등이 있다. 최근 코리아 디스카운트 대표 사례로 꼽히는 것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개별 사안마다 개별 조항을 뜯어고치는 '각개전투'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물적분할때 모회사 주주에게 신주인수권을 주거나, 주식양수도때 의무공개매수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상훈 교수는 "미국은 물적분할 때 신주인수권을 기존 주주에게 주라는 등 시시콜콜 규정하고 있지 않다"며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넣으면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금융위원회가 도입할 예정인 의무공개매수제도 역시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도입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전제로 추진하는 것이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이상훈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은 "주식회사의 역할을 다시 고민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대기업과 대자본이 일반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지난해 카카오 먹통 사태는 더 이상 회사 내부의 사고로만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공무원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근무해야 한다는 문구는 국가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며 "이사의 충실의무 역시 회사뿐만 아니라 회사의 구성요소인 주주에 대해 충실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2006년 영국 회사법에 '전체주주로서의 주주의 이익을 위하여'라는 문구를 넣었다"며 "해외에서는 회사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이 동일하기 때문에 회사와 주주의 이익이 괴리된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노종화 변호사(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는 "현재 대법원 판례는 법률적으로 당연히 보호되어야 할 주주 이익을 외면하고 있다"며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의무를 명확히 하고 주주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BYC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트러스톤자산운용 이성원 부사장은 "BYC의 사례는 대주주의 사적 이익을 위해 회사의 이익은 물론 일반주주의 이익을 침해한 사례"라며 "이사진이 회사에 대해 충실의무를 규정한 현행 상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실제 일반주주에 대한 피해구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성원 부사장은 "이번 상법개정안이 통과하면 기관투자자의 주주활동이 활성화하고 기업 지배구조개선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넣은 상법개정안은 두개 법안이 발의돼 있다. 지난해 3월 이용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개정안과 지난 9일 박주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개정안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이용우 의원은 "기업에 자본을 공급해주는 주주의 권익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시장은 클 수가 없다"며 "소액주주와 대주주를 구별할 필요없이 주주의 이익은 똑같이 대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주민 의원은 "올해 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넣은 상법개정안을 통과시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