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25년 만에 의무공개매수제도 재도입에 나선다.
금융위는 21일 '주식양수도 방식의 경영권 변경 시 일반투자자 보호방안 세미나'를 열고 내년 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을 담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내놓는다고 밝혔다.
25년 만에 소액주주를 보호할 장치를 내놨지만 한계는 있다. 주식 전부를 매수하도록 하는 유럽이나 의무공개매수제도는 없어도 회사법에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미국과 달리 금융위가 내놓은 이번 방안은 최대주주가 의무매수를 통해 총 발행주식수의 절반(최대주주 지분과 의무매수지분 합산)만 확보하도록 하고 있어 다소 아쉬움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1997년 도입 후 폐지…대주주만 프리미엄 받아와
이날 세미나에서 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 방안을 발표한 김광일 금융위 공정시장과장은 "합병이나 영업양수도를 할 때는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치고 주식매수청구권도 부여하지만 주식양수도는 일반주주 보호장치가 없다"며 "일반투자자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의무공개매수제도는 기업 인수·합병(M&A)을 목적으로 특정 회사의 주식을 사들일 때 일반주주 주식도 공정한 가격에 일정 비율 이상 의무적으로 매수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1997년 도입됐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기업 구조조정을 지연시킨다는 우려 속에 1998년 폐지했다.
하지만 의무공개매수 제도가 사라진 이후 총수일가 등 최대주주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여 비싼 값에 주식을 팔았지만, 일반 투자자는 제 값을 받지 못해 공정한 인수·합병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또 이러한 제도적 허점이 코리아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를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라는 문제제기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 영국, 독일,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 금융시장은 의무공개매수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미국은 의무공개매수제도는 없지만 회사법에 이사회가 회사뿐 아니라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지도록 하고, 발달한 민사소송제도를 통해 소액주주 보호장치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광일 과장은 "미국처럼 이사회가 소액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민사소송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이 방안은 단기간에 국내에 도입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M&A 시장이 위축되지 않으면서 주주보호 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25% 이상 지분 확보 시 의무공개매수 적용
금융위가 제시한 의무공개매수제도의 핵심은 경영권 변경을 목적으로 상장회사 주식 25% 이상을 확보하면서 최대주주가 되는 경우 의무공개매수제도를 적용한다는 내용이다.
가령 A회사 최대주주의 지분을 30% 이상 매입한 B사는 반드시 일반주주의 주식도 의무공개매수방식으로 사들여야 한다. 이 때 일반주주의 주식을 전부 사들이는 것이 아닌 B회사가 확보한 A회사 최대주주의 지분(30%)과 일반주주 대상 의무공개매수지분을 모두 합해 총 발행주식의 50% 이상만 확보하면 된다.
다만 이 방식은 EU와 영국이 채택중인 주식 전부(100%)를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방안보다 느슨한 정책이다. 따라서 금융위가 내놓은 이번 방안을 모든 주주들에게 공평하게 적용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정준혁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의무공개매수물량이 100%가 아닌 50% 이상으로 적용한 것은 아쉽다"며 "나머지 50% 주주들의 권리도 보호할 수 있도록 100% 의무공개매수로 가야한다"고 지적했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도 "가령 최대주주의 지분을 45%를 매입하면 5%만 의무공개매수하고 최대주주 지분을 50% 확보하면 아예 의무공개매수제도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구멍"이라고 말했다.
다만 100% 취득을 강제하면 경영권 인수자 입장에서 재무적 부담으로 작용할 거라는 반론도 있다.
송영훈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 상무는 "유럽처럼 100% 의무취득하도록 하면 매수자의 부담이 클 거라는 건 사실"이라며 "특히 우리나라처럼 경영권 프리미엄 가격이 높은 곳에서 100% 매수를 의무화하면 매수자가 큰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우려했다.
25% 지분확보 규정…사각지대 활용한 편법 우려
25%이상 지분 취득 시 의무공개매수제도를 적용하는 현 방안은 또 다른 편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준혁 서울대 교수는 "금융위가 내놓은 방안에 따르면 가령 24.9% 지분을 인수하면 의무공개매수제도를 적용받지 않는다"며 "코스닥 상장사 등 작은 규모의 기업들은 20% 미만의 지분만 가지고도 회사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정우용 한국상장사협의회 정책부회장은 "의무공개매수제도를 피하기 위해 지분을 쪼개서 여러 회사가 취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송영훈 한국거래소 상무도 "M&A시장이 위축되지 않으면서 주주보호장치를 찾다보니 한계가 있다"며 "최대주주 지분취득률에 따라 일반주주들의 엑시트(투자금 회수) 기회가 제한받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만 송영훈 상무는 "모든 주주들이 의무공개매수제도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최대주주 지분을 많이 취득할수록 건전한 기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반투자자 보호가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는 "장기적으로는 미국처럼 이사회 충실의무를 도입해 의무공개매수제도 없이도 모든 소액주주를 보호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년 자본시장법 개정안으로 추진
금융위는 이날 발표한 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 방안을 내년 자본시장법 개정안으로 입법화할 예정이다.
지금도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장회사에 관한 특례법', 배진교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각각 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이 들어가 있지만, 세부 내용을 보면 금융위가 이날 발표한 방안과 정확하게 일치하진 않는다. 따라서 금융위는 의원 입법안과 별도로 자체적인 정부 입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제도 도입을 통해 최소 50% 이상은 같은 가격에 주식을 사야 하니 매수자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며 "다만 경영권을 계속 지키고 싶은 최대주주는 이 제도 덕분에 자신의 지분을 지켜 낼 수도 있고(50% 이상을 같은 가격에 사야하니 가격부담이 있어 매수자가 지분매입을 포기한다는 뜻)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사이에서의 합리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윤수 금융위 자본시장정책관은 "의무공개매수제도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커버할 수는 없고 부작용 또한 나올 수 있지만 적어도 제도 도입을 통해 경영권 프리미엄 가격 자체가 낮아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모든 주주들이 과실을 같이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