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나 중국 정치인들은 자국 기업이 미국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지난달 3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감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기자는 '유럽이나 중국 정치인들'이란 대목에서 순간 빵터졌는데요. 이틀 연속 여야 의원들로부터 십자포화 공격을 당하던 이 창업자가 한수 높은 발언으로 대갚음을 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발언의 전문을 요약해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국경이 없는 인터넷 산업의 특성을 생각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선 자국 기업 보호에 힘을 모으고 있다. 나는 10년 전 일본에서 라인을 성공시켰고 현재는 유럽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다.'
▲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딱히 날선 비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라면 여기엔 이 창업자의 불편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것입니다. 그가 의원들에게 '당신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라고 고함을 치려다 만듯한 느낌도 받았을 겁니다.
국내 인터넷 서비스 산업은 올해로 20여년을 맞이하고 있으나 제조업 등 다른 분야에 비해 홀대를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네이버를 포함한 인터넷 업체들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웹 생태계 초토화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동네북' 신세를 피하지 못했는데요.
관련 업계에선 정부와 정치권이 산업을 밀어줘도 모자랄 판에 규제 올가미를 씌우려 한다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과도한 규제 탓에 토종 기업들만 고사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창업자의 발언에도 이 같은 피해 의식이 묻어났습니다. 실제로 국감에서 쏟아낸 말들을 보면 '그동안 못했던 말을 다 하고 가자'며 작정하고 나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창업자는 같은 증인으로 출석한 삼성전자, KT, LG유플러스 등 다른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에 비해 유독 질타를 많이 받았는데요. 그럴 때마다 다소 격앙된 톤으로 받아쳐 국감장을 술렁이게 했습니다.
특히 주력인 검색광고 사업이 소상공인에게 막대한 비용 부담을 준다는 지적에 대해선 구체적인 액수와 수치 등을 제시하면서 반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구글 역시 같은 사업 모델로 더 많은 수익을 거두고 있다며 발끈하기도 했죠.
국감 동안 이 창업자의 태도가 불량하다는 의원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증인들이 고분고분하게 대답을 하는 것과 비교됐으니깐요.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진 이 창업자가 처음 국감장에 등장, 거침없이 발언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네이버가 외부 공격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방어하는데 치중했다면 지금은 공격적으로 변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창업자의 국감 발언을 계기로 네이버는 최근 구글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요.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지난 9일 공식 질의서를 통해 구글에 대해 국내에서의 세금 납부액과 고용 규모, 망 사용료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네이버가 영업기밀에 속하는 망사용료나 검색조작(어뷰징) 이슈 등 민감한 내용들을 들추어 내면서 구글에 싸움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네이버가 대표이사 명의로 공개질의한 것 자체가 이례적입니다. 검색 업체라면 쉬쉬할만한 이슈를 역으로 쟁점화한 것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법조인 출신의 김상헌 전 대표 시절의 네이버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기도 합니다.
일부에서는 네이버가 뉴스 배치 조작 의혹에 몰리자 국면 전환을 하기 위해 구글과 붙은 것 아니냐고 보고 있는데요. 아직 구글이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어 두 회사의 싸움이 계속될지, 싱겁게 끝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관련 업계에선 구글이 스스로 발목이 잡힐 수 있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네이버 역시 이 점을 노린 것으로 풀이됩니다.
또한 네이버와 구글간 공방 기사 댓글에 '구글 역시 네이버와 별반 다를게 없다'는 반응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네이버 내부에선 이번 기회에 '구글은 무조건 선하고 네이버는 악하다'는 이용자 인식을 깨보려 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같습니다. 과거와 달리 독해진 네이버의 전략이 통했다는 얘기입니다. 대외 이슈에 대응하는 모습이 달라진 네이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