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의 향방을 가를 '키맨'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지난 16일 경기도 김포시에 위치한 한양정밀 본사에서 본 그는 언론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모습이었다. 신 회장을 만나기 위해 기자가 회사 정문 앞에서 긴 시간 기다렸으나 신 회장은 입을 꾹 닫은 채 이른 오후 회사를 떠났다.
지난달 방문했던 당시와 비교해 회사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경비는 한층 더 삼엄해졌다. 신 회장의 출근시간이 가까워지자 본사 건물에서 나온 한 간부급 직원은 회사 바깥 도보에도 서있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한양정밀은 신 회장이 1981년 직접 세운 소형굴삭기 및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다. 지난 2022년 연 매출액은 약 800억원에 달한다. 신 회장은 무척 엄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비서도 짤릴까봐 기자가 왔다고 선뜻 말하지 못한다"고 한 직원은 귀띔했다.
이러한 신 회장이 이번 분쟁의 핵심인물로 떠오른 이유는 그가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 때문이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신 회장의 한미사이언스 보유 지분율은 12.1%로 송영숙 회장(12.5%) 다음 두 번째로 높다.
현재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 통합안을 두고 두 쪽으로 갈라진 한미그룹 오너일가 장차남(임종윤·임종훈)과 모녀(송영숙·임주현) 간의 지분율 차이는 약 0.5%포인트다. 신 회장이 누구 편에 서느냐에 따라 경영권 분쟁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는 구도다.
특히 이번 분쟁이 정기주주총회 표대결로 번지면서 신 회장의 입김은 더욱 세질 전망이다. 앞서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사장과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는 지난 8일 한미사이언스에 오는 3월 열리는 정기주총에서 새 이사 6명을 선임하는 내용의 주주제안권을 행사했다.
신 회장은 고(故) 임성기 창업주의 고향 후배로 한미그룹 오너일가와 인연이 깊다. 그는 임 창업주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그의 우군 역할을 자처했다. 한미약품이 2000년 동신제약을 인수할 당시 신 회장이 동신제약 주식 60만주를 한미 측에 장외거래로 넘겨준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임 선대회장이 타계한 이후 신 회장과 한미그룹 일가 사이의 관계는 이전보다 느슨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임성기 회장이 살아계실 때는 한미약품 사장진이 신 회장을 만나러 자주 회사로 찾아왔으나 돌아가신 후로는 발길이 뜸해졌다"며 "작년 초 이후로 아직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제약업계에서는 오너일가와 멀어진 신 회장이 자신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가치를 높이는 데 유리한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보다 우호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측에 지분을 처분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신 회장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가치는 지난 2016년 1조원에 달했으나 이후 주가가 줄곧 하락해 현재 약 4000억원까지 줄어든 상태다.
이번 경영권 분쟁으로 한미사이언스 주가가 뛰면서 신 회장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가치는 약 500억원 증가했다. 16일 종가 기준 한미사이언스의 주가는 4만3800원으로 OCI그룹과 통합 발표를 한 당일(1월 12일 종가)보다 14%(5400원) 증가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신 회장이 금융사 미팅에서 한미사이언스 지분 매각시기를 여쭤봤던 적이 있다고 들었다"라며 "한미약품그룹 오너일가 중 더 우호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쪽에 그가 지분을 처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