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을 입은 20~30명의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같은 그룹 소속의 스포츠팀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댄다.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에선 누군가를 헹가레치면서 승리를 만끽한다.(지난해 서울 A지역 수주전 직후)
"투표 결과가 나오면 만세가 터집니다. 그런데 우리 측의 만세가 아니다하는 그 순간 무릎이 확 꺾이면서 주저앉게 됩니다. 시공사 선정엔 1표차든 2표차든 관계없이 승자 독식이고 2등은 없으니까요."(대형 건설사 관계자)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의 프로젝트다. 재개발·재건축 수주를 따내기 위해 시공사들은 엄청난 인력과 예산을 쏟아붓는다. 담당 직원들은 몇달간 집에 못들어가기 일쑤다. 그 기간 링거를 맞으면서도 한표를 더 우리 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그야말로 사투를 벌인다. 그 결과를 받아드는 순간 이처럼 희비는 극명히 엇갈린다.
◇ 1표 더 얻기 위한 사투
서울의 입지 좋은 사업장을 기준으로 할 경우 시공사들은 1년 이상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발품을 팔며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최근 가장 핫한 한남3구역의 경우 이미 1년 전부터 시작됐다. 2017년 단군이래 최대 규모의 사업장이라는 반포주공1단지(1·2·4주구)의 경우 이미 2014년, 2015년부터 경쟁이 시작됐다는 게 정비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 사업장은 결국 현대건설 품에 안겼다.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 총회장에서 조합원들에게 엎드려 큰절을 했던 일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굵직한 사업장에 건설사 CEO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들이 종종 생겼고 그만큼 수주전이 치열해지고 있는 점을 방증한다.
수주전의 시작은 대부분의 사업이 그렇듯 사업성조사부터다. 좀 다른게 있다면 사업성조사와 회사선호도 조사를 병행한다는 점이다. 사업성 조사와 현장 조사를 통해 자연스레 조합원을 접촉하고 이 과정에서 소위말해 우리편인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선호도가 비등하다고 판단되면 해볼만한 싸움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가령 A사 B사 C사가 30대 30대 30 혹은 5~10% 내외의 선호도 차이를 보이는 경우엔 경쟁구도가 형성되는 식이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우리가 조건 하나만 더 잘 쓰면 5~10%포인트 내외의 초기 선호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경쟁에 뛰어든다"고 말했다.
반면 최근 성공적으로 후분양을 마친 과천 주공1단지의 경우 초기 선호도 조사(C사 분석)에서 A사 60~70%, B사 15%, C사 10%에 불과했지만 C사가 과감히 들어가 사업을 따내기도 했다. C사는 이미 알고 있듯 대우건설이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오랜 기간 이런 구도가 굳어진 것이라면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시공사가 포스코건설이었다가 계약이 깨지면서 재입찰에 들어간 케이스로 A사에 대한 막연한 선호라고 판단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결국 총회 일주일 전 선호도를 동률로 끌어올렸고 승기를 잡았다.
◇ 발품·눈도장에 여행까지
사업장에 따라 다르지만 반포주공1단지의 경우 당시 양사가 300명 이상의 직원(계약직 포함)을 투입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남3구역도 조합원이 3800여명으로 반포주공1단지 못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D건설사 한 관계자는 "담당자 한명이 하루에 차한잔 마시거나 얼굴 한번 보는데도 다섯명의 조합원을 채 못만난다"면서 "한 사람이 케어할 수 있는 조합원 수는 10명도 많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담당 직원들은 이처럼 조합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성향을 분석해 매일매일 보고하면서 시공사 결정 총회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한때 시공사가 조합원들을 모아 여행을 보내주는 일도 잦았다. 물론 지금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이렇게 여행을 보내주는데는 조합원들의 표를 더 가져오기 위한 것보다는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 관계자는 "3박4일이든 여행 기간 동안엔 경쟁사와의 접촉을 막는 효과가 있다"면서 "총회 임박해서 출발해 투표 당일 총회장 앞에 내려주는 식"이라고 말했다.
'내가 소싯적에 (여행지에서 일찍 출발하지 못하도록)버스 바퀴 잡고 누워 있었다'는 식의 선배들의 무용담(?)도 수주 담당자들 사이에선 전해진다. 담당자들이 세입자로 해당 지역에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E건설사 한 관계자는 "사실 총회 날짜가 다가오면 쉬라고 해도 못쉬고, 집에 가라고 해도 못간다"면서 "결국 한표 때문에 질수 있는 싸움이기 때문에 잠도 못잔다"고 말했다.
◇ 결국 입찰제안서 관건…과도한 제안 부작용으로
수주 담당자들은 과거엔 한번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고 정과 의리로 호소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조합도 전문화되면서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조합원들 간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한 소통과 정보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입찰제안서가 나오면 타 사업장 사례와 비교해 비교표를 만들어 공유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입찰제안서를 본 이후 이탈자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남3구역 등에서 시공사들이 무리한 제안을 하는 것도 결국 이런 이유로 보고 있다.
또 다른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2017년 강남지역의 수주를 치르면서 시공사들이 깨달은 것은 조합원들도 현명해져서 브랜드 선호도와 조건에 대한 비교분석 등을 거쳐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라며 "과거처럼 문 두들기며 뛰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는 와중"이라고 말했다.
정부 역시 그동안 민간의 영역으로 바라봤던 정비사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 시작이 반포주공1단지로 보고 있다. 집값 상승 등의 이슈와 얽히며 최근엔 한남3구역에 행정조치 등의 적극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데까지 왔다.
다만 건설사 관계자들은 "지금 이 제안서를 잘못 쓰면 나중에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들을 조금 더 구체적이고 명확히할 필요는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모호하고 포괄적인 규정이 과도한 경쟁을 유발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