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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 대신 '밋밋한 아파트'만 짓는다

  • 2020.01.21(화) 14:25

서울시 재건축 규제강화에 자취 감추는 특화‧혁신설계
과도한 규제, 도시 경관 및 경쟁력 저하 등 역기능 우려

'호텔을 연상케 하는 아파트,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단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화설계….'

한 때 유행처럼 번지던 아파트 단지의 '고급화 바람'이 한 풀 꺾이고 있다.

서울시가 시공사들의 지나친 정비사업 수주 경쟁이나 난개발을 막기 위해 특화‧혁신설계를 제한하면서다. 경쟁적으로 고급 설계를 내세우던 강남 등 주요 지역에서도 더 이상 다양한 외관의 프리미엄 단지를 조성하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전문가들도 과도한 설계 규제로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오히려 도시의 개성과 경쟁력을 깎아내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2017년 반포주공1단지 1‧2‧4주구 모습./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특화설계 쏙 들어간 수주전

서울에서 재건축‧재개발을 추진하는 조합들은 설계변경 허용 범위 내에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바짝 신경 쓰는 모습이다.

서울시 '공공지원 시공사 선정기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등에 따르면 시공사는 기존 건축심의 내용의 10% 이내에서만 설계 변경(대안설계)할 수 있다.

이 범위를 초과한 설계를 특화 설계 또는 혁신 설계라고 하는데 스카이브릿지, 동수 및 세대수 변경, 오버브릿지, 커튼월 등이 대표적이다. 관련기사☞[인사이드 스토리]한남3구역에 던져진 이유있는 '공수표(?)'

이런 설계는 서울시 기준이나 도정법 위반에 해당하지만 그동안 정비 업계에선 '더 고급스러운 아파트'를 짓기 위해 공공연하게 활용돼 왔다.

지난 2017년 수주 대전을 치른 반포주공1단지 1‧2‧4주구의 경우 시공사들은 입찰 제안을 통해 스카이브릿지, 덮개공원 설치 등의 특화설계안을 내놨다. 이 사업장을 품에 안은 현대건설이 제시한 조감도를 보면 고급 호텔을 연상케 할 정도다.

고급 설계가 유행하면서 신반포3차‧경남아파트, 미성‧크로바, 신반포15차, 신반포18차, 한신4지구 등도 시공사 선정 때 스카이브릿지, 스카이 커뮤니티 등의 특화‧혁신설계가 제시된 바 있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해까지도 이어졌다. 지난해 말 재개발 최대어인 한남3구역 재개발 사업에 시공사들이 몰리면서 층수 상향, 동수 축소, 최고층수 평면 변경, 브릿지 설치 등 각종 특화설계안이 나왔다.

결국 서울시와 국토교통부가 대안 설계 범위를 벗어나는 설계 변경 등을 바로잡기 위해 이례적으로 현장점검을 하고 검찰수사까지 이어지자 분위기는 일순간 바뀌었다.

올해 첫 수주전이었던 한남하이츠 시공사 선정 때는 입찰에 참여한 GS건설과 현대건설 모두 조합안의 10% 이내의 경미한 변경에 해당하는 대안설계안을 제시했다. 올해 시공사 선정을 앞두고 있는 갈현1구역 등도 시공사에게 '서울시 가이드라인에 맞춰 설계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결국 집값 오를까봐?…도시 개성·경쟁력 저하

서울시는 기세를 몰아 설계 제한을 한층 더 엄격히 하는 모습이다. 최근엔 특별건축구역에서 아파트를 특화설계하는 걸 금지하기로 했다.

'건축법'에 따르면 특별건축구역이란 조화롭고 창의적인 건축물의 건축을 통해 도시경관 창출, 건설기술 수준향상 등을 도모하기 위해 일부 규정을 적용하지 않거나 완화, 통합 적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지정하는 구역이다.

하지만 취지와 달리 재건축 아파트의 과도한 설계변경을 막는데 활용되고 있다. 최근 잠실 미성‧크로바 재건축의 경우 서울시가 특별건축구역 지정을 전제로 설계안 변경을 요구하면서 기존 설계안에 있던 특화설계를 대부분 뺐다.

이 아파트는 롯데건설이 수주할때만 해도 스카이브릿지, 커튼월룩 등 특화 설계를 통해 랜드마크급의 고급 단지로 재탄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서울시의 의견이 반영된 설계안을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성냥갑 아파트에 그친다.

이대로라면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된 한남뉴타운, 반포주공1단지, 진주아파트 등 총 19개 사업장도 비슷한 과정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과도한 규제'라며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새로운 변화와 혁신적 디자인 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미래지향적인 주거 단지나 설계가 이뤄질 수 있다"며 "좋은 건물을 지어서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고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메커니즘이 되는데, 이를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서울시의 이같은 행보가 사실상 집값 상승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도 나왔다.

두성규 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설계 규제를 재건축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듯하다"며 "표면상으로는 과도한 수주경쟁 방지, 계획적 개발 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상 특화설계, 랜드마크 단지 등을 제시하면 시장에서 주목받게 되면서 가격이 오를까봐 규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이 경쟁력 있는 국제도시로 발전하려면 성냥갑 아파트 등 기존 주택 유형을 단순 반복해서는 안 된다"며 "특히 요즘 짓는 주택들은 수명이 더 길기 때문에 노후화, 안전성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주거문화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도록 설계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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