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달도 따줄게요.'
상대방이 원한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늉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전하곤 합니다. 정비 업계에서도 이같은 애정(?) 공세가 치열한데요. 최근 대림산업, 현대건설, GS건설이 도전장을 내민 한남3구역 재개발 수주전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아파트 층수를 높이고, 가구 평면을 3베이에서 4베이로 바꾸는 등 대안‧특화 설계로 단지를 더 돋보이게 하겠다는 솔깃한 구상(입찰 제안)을 내놨는데요.
하지만 이런 내용은 '중대한 설계변경'이라 건축 인허가를 다시 받아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상 현실화하기 어어렵고 정부도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시공사들이 공수표(?)를 던지는 것은 왜 일까요
◇ 대안설계, 그게 뭔데?
한남3구역 시공사 선정을 위한 입찰에 참여한 3개사는 모두 입찰 제안서에 '대안 설계'를 제시했습니다. 대안설계는 기본 설계에서 벗어나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고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는 설계인데요.
용어가 명확히 구분돼 있진 않지만 통상 '경미한' 설계 변경일 경우 대안 설계에 속하고요. '중대한' 설계 변경이면 특화 설계 또는 혁신 설계라고 칭합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지난 5월 30일부터 생겼습니다. 서울시가 '공공지원 시공자 선정기준', '공동사업시행 건설업자 선정기준' 개정안을 고시하며 대안설계 관련 지침을 처음으로 마련한 건데요.
서울에서 정비사업 수주에 참여하는 시공자는 정비사업 시행계획의 원안 설계를 변경하는 대안 설계를 제시할 때 경미한 변경만 허용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경미한 변경이란 ▲정비사업비의 10% 범위로 변경하거나 관리처분계획 인가 변경, 대지면적 10% 범위 변경 ▲부대시설‧복리시설의 설치규모 확대‧가구당 주거전용면적 1% 범위 내 내부구조의 위치 또는 면적 변경 ▲내‧외장 재료 변경 등이 해당됩니다.
가구 수, 층수, 동수 변경은 안 되고요. 건축물의 동수나 층수를 유지해도 바닥면적 합계가 50㎡ 이상 변경되면 안 됩니다. 동 위치 변경도 1m 이내에서만 가능합니다. 한남3구역의 사업시행 기본계획인 지하 6층~지상 22층, 197개 동, 5816가구는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거죠.
대안설계로 제시할 수 있는 건 단지나 가구 내 숨은 공간을 좀 터준다거나 동 배치, 조경, 디자인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이게 된다고?
하지만 한남3구역 시공사들이 제시한 설계안은 경미한 변경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대림산업은 특화 설계를 통해 동수를 197개에서 97개로 줄이겠다고 했고요. 최고층수도 22층에서 29층으로 높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GS건설은 세대수를 조정하고 3베이는 4베이로 변경, 커뮤니티는 4개를 1개로 통합(리조트형 통합 커뮤니티), 건물과 건물 사이에 브릿지 설치 등을 제시했는데요.
이런 제안은 모두 중대한 변경에 속합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경미한 변경의 범주 외 사항은 중대한 변경이라 별도의 인허가 절차가 필요하다"며 "층수, 동수 변경은 경미한 설계 변경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공사들이 제안한 특화 설계를 적용하려면 변경 사업시행인가 등 각종 인허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건데요. 이 과정에서 시간이 소요되고 공사비가 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조합만 손해를 보게 되는 거죠.
그동안에도 이런 사례는 빈번했습니다. 성남은행주공아파트 재건축의 경우도 성남시가 최고 층수를 30층으로 제한하고 있었지만, GS건설과 HDC현대산업개발이 35층 설계를 제안하며 시공사로 선정됐는데요. 결국 지자체 허가를 다시 받아야 해서 사업 지체 등으로 인한 조합과 시공사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우려가 나오자 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나섰습니다. 한남3구역에 대한 수주 경쟁이 혼탁해지자 시공사들의 입찰 제안서를 점검해 과도한 설계 변경부터 불법 사전 홍보 행위, 재산상 이익 약속 등 위법 행위가 있는지 들여다본다는 건데요.
서울시 관계자는 "입찰 제안서에 경미한 설계 변경 범위를 벗어나는 부분이 있으면 구청에 위반 조치 통보 요청을 할 것"이라며 "구청에서 해당 내용을 조합에 통보하면 조합에서 일정 절차를 거쳐 처리할 텐데 입찰 무효까지 갈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 현실적으로 제재 어렵다는데?
문제는 국토부와 서울시의 이런 으름장이 현장에서는 별로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위법 사항이 발견돼 벌금이나 최대 고발을 당할 수 있지만 정작 시공사들이 무서워하는 '입찰 무효'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입찰 제안서는 말 그대로 '제안'이기 때문에 확정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방패막이가 될 수 있습니다. 중대한 설계변경을 제안한 시공사들도 "하나의 아이디어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는데요. 무조건 한다는 게 아니라 조합에게 '우린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는 걸 나타내는 거라고요.
한남3구역에 입찰한 한 시공사 관계자는 "혁신 설계는 (경미한 설계 변경 범위에서 벗어나) 손을 본 건 맞다"며 중대 설계 변경을 인정하면서도 "보통 시공사 선정 후 사업시행인가를 다시 받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습니다.
더군다나 설계 변경의 경우 직접적인 제재 방안도 없는게 현실입니다. 법을 위반한 건 아니기 때문이죠.
국토부 관계자는 과도한 설계 변경에 따른 제재 여부에 대해 "서울시 조례로 하는거라 법으론 (제재) 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번 합동점검 결과 시공사들의 설계 변경안이 경미한 범위를 넘었다고 해도 서울시는 구청에, 구청은 조합에 해당 사실을 '통보'만 할 수 있는 셈입니다.
이 통보가 제재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설계변경부터 개별 홍보까지 지금 3개사 모두 입찰지침, 도정법을 위반하고 있다"면서도 "입찰 자격을 박탈시킬 수 있는 권한은 조합에만 있어 입찰 무효까지 가진 않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이어 "구청에서 조합에게 시공사의 도정법 위반 등을 통보하면 조합이 대의원회 등을 거쳐 어떻게 할 지 정해야 하는데, 어떤 조합이 입찰 무효를 원하겠느냐"고 덧붙였습니다.
이은형 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조례 위반에 따른 제재는 경미한 수준인데다 시공사가 도정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조합들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에 입찰 무효, 시공사 선정 취소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며 "강력한 제재 수단이 없으니 시공사들 사이에선 '일단 수주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외에도 한남3구역 입찰 제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주비 대출 지원, 임대가구 0가구, 분양가 보장 등은 도정법 위반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도정법에선 시공사 선정 시 조합원에게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거나 약속하면 '시공사 선정 취소'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역시 현 입찰단계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아닌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