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대대적인 주택 공급을 예고했습니다. 5년간 전국적으로 총 27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고 했는데요. 지난 정부(257만 가구)보다 공급 규모를 키우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서울에 더욱 집중적으로 주택을 늘리겠다는 게 골자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기조는 금세 달라졌습니다. 4개월 만인 지난해 12월 경제정책에서 '속도 조절'을 언급한 건데요. 270만 가구 공급 계획은 정상적으로 추진하는 걸 원칙으로 하겠다고 했지만 시장 상황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관련 기사: 내년 초 규제지역 추가 해제…주택 공급은 속도 조절(12월 21일)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 국회에서는 공급 속도뿐만 아니라 물량 조정도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요즘 급증하는 미분양 주택 등을 고려할 때 계획대로 추진하는 게 적절한지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인데요.
과연 이런 움직임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주택 침체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정말 공급 물량을 줄일 필요가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서도 '시장 정상화' 위해 공급 줄여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부동산시장 동향 및 리스크 요인과 정책 과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요즘 부동산 시장의 흐름과 이에 따른 윤석열 정부 정책의 적정성 등을 살펴본 보고서인데요.
이중 정부의 270만 가구 공급 계획이 적절한지 논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최근 금리인상과 주택가격하락, 미분양증가 등의 상황을 고려할 때 자칫 주택공급량 증가로 시장 침체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지적인데요.
보고서는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3 경제정책방향'에서 주택 공급 속도 조절을 언급한 것도 최근의 시장 침체 흐름을 반영한 거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문재인 정권 시절 집값이 급등할 당시 시장에서는 주택 공급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 바 있습니다. 이번 정부는 이를 고려해 앞으로 주택 공급을 더욱 늘리겠다는 방침을 내놓은 건데요.
하지만 시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체' 흐름으로 바뀌었으니 정부도 고민이 깊을 듯 합니다.
과거에도 시장 침체에 대응해 주택 공급을 줄인 적이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데요.
지난 2013년 박근혜 정부는 4.1대책을 통해 '주택시장 정상화 방안'을 내놨습니다. 이 중 가장 첫 번째 대책이 바로 주택공급물량을 시장 상황과 수요에 맞게 적정한 수준으로 조절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공분양주택을 기존 연 7만 가구에서 2만 가구로 축소하고, 수도권 그린벨트 내 신규 보금자리지구 지정을 중단하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는데요. 이는 앞서 이명박 정부가 추진했던 보금자리주택 공급을 사실상 중단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음 해인 2014년에는 9.1대책을 통해 택지개발촉진법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이 법이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2017년까지 신규 택지 지정을 중단했고요.
이 외에도 박근혜 정부는 '빚내서 집을 사라'며 금융·세제 등 전방위적 규제 완화 정책을 추진했는데요. 결국 집권 말기에 부동산 시장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 "공급 계획, 시장 흐름에 흔들려선 안돼"
그렇다면 지금도 당시처럼 공급 조절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당장의 시장 흐름에 휘둘려 공급 계획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한목소리를 모읍니다.
정부가 내놓은 주택 공급이라는 게 마치 '빵'을 만들듯이 단기간에 만들어 사람들이 입주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정부의 계획은 대체로 인허가 물량을 지칭하는데요. 이는 당장 시장에 물량이 나와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연구실장은 "주택 공급은 인허가에서 시작해 착공과 분양, 준공, 입주 등의 단계를 거치게 돼 있는데 정부가 하겠다는 것은 인허가"라며 "주택 공급에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향후 시장이 살아났을 때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를 해 기반을 마련해 놔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서진형 경인여대 MD비즈니스학과 교수 역시 "지금 공급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실제 입주가 이뤄지는 건 5~10년 뒤인데 당장 주택 시장이 침체한다고 해서 물량을 조절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더욱이 여전히 주택 물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요. 특히 서울의 경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는 지적입니다.
실제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94.2%를 기록한 바 있는데요. 2020년 이후 2년 연속 하락했습니다. 다른 주택 수급 지표인 1000명당 주택 수를 봐도 서울은 402.4채 정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462채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에 있고요. ▶관련 기사: 주택보급률 2년 연속 추락…1인 가구 느는데 공급은 부족(1월 2일)
이에 따라 대구나 인천 등 주택이 이미 과잉 공급된 지역 외에 서울이나 수도권 등은 꾸준히 공급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서울의 경우 주택 보급률이 여전히 낮고 수요가 있기 때문에 집값이 조정된 뒤에는 다시 시장이 불안해질 여지가 있다"며 "당장 서울 공급량을 줄이면 3~4년 뒤 다시 집값이 급등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실장 역시 "대구나 인천 등 공급이 과한 지역에 한해 인허가 물량을 국지적으로 조정할 필요는 있다"며 "다만 전체적인 주택 공급 계획을 유지하고 택지도 미리미리 준비해놔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섣불리 주택 공급을 줄일 경우 이후 집값 급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김 실장은 "박근혜 정부 당시 보금자리지구와 재정비 촉진 사업 지구 등을 해제했는데 이후 시장이 살아난 뒤 주택 가격이 급등하는 경험을 한 바 있다"며 "공급 정책은 당장의 시장의 흐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고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가 지역별 수요 예측을 할 수 있도록 관련 통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옵니다. 수요에 맞게 공급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인데요.
고 원장은 "수요 예측을 정확하게 해야 지금 얼마나 부족한지 혹은 과잉 공급이 됐는지 판단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런 세세한 계획 없이 인허가를 내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