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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는 스토리다]② 설화수는 어떻게 탄생했나

  • 2015.09.10(목) 17:19

두평남짓 연구실, 작지만 큰 첫걸음
설화수, 30년간 켜켜이 쌓인 결과물

해방 뒤 화장품 시장은 '없어서 못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경기를 누렸다. 기다리던 해방이 왔음에도 물자부족과 좌우대결 등 사회혼란이 벌어지자 자신을 가꾸는데서 위안을 찾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일본업체들이 철수하면서 화장품 원료와 제품의 공백이 생겼고, 그 결과 수요초과 상태가 벌어졌다. 이 기간 중 고(故) 서성환 회장은 자신이 만든 첫 제품인 '메로디 크림'(1948년)을 내놓았다. 메로디 크림은 아모레가 생산한 제품 가운데 독자적인 이름(브랜드)을 달고 나온 첫 화장품이다.

◇ '기회는 그 곳에'..위기의 역설

▲ 아모레가 6·25 전쟁 중에 선보인 국내 첫 식물성 헤어크림이다.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故 서 회장은 그 곳에서도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남성을 겨냥했다는 점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화장품이 웬 말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남성들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자신을 치장하는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엔 머리를 좌우로 갈라붙이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했다. 헤어크림이 워낙 불티가 나자 아모레는 일본의 것을 그대로 베낀 짝퉁제품인 '아데나 크림'을 판매해 재미를 봤다. 故 서 회장은 현금을 주체할 수 없어 여관방에서 베개 삼아 베고 잔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크림은 바셀린과 파라핀왁스, 유동 파라핀 등 광물성 물질을 주원료로 했다. 머리를 감아도 끈적이는 성분이 빠지지 않고, 오래 사용하면 머리카락이 누렇게 변색되는 문제가 있었다. 故 서 회장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식물성 원료인 피마자유로 만든 국내 최초의 식물성 헤어크림을 선보인다. 이 제품의 이름은 'ABC포마드'(사진·1951년)다.

그는 짝퉁제품으로도 계속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행히 ABC포마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제품을 올려보내면 서울역에서 기다리던 도매상들이 모두 가져가 서울에 창고를 둘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 화장실을 개조한 연구실

▲ 아모레는 국내 화장품업계 처음으로 연구실을 열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故 서 회장은 국내 화장품업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다. 그의 나이 서른이 안된 시기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혁신을 시도해 부를 거머쥔 20대의 스타트업 창업자라고 할까.

그는 전쟁 이후엔 공장 화장실을 개조해 두평 남짓한 연구실(1954년)을 만들었다. 지금의 눈으로는 초라해보일 수 있어도 당시 국내 화장품업계에선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허름했던 연구실은 현재 500명 이상의 국내외 연구진을 보유한 아모레의 핵심조직(기술연구원)으로 발전했다.

한상훈 아모레 R&D유닛 전무는 "아모레 연구진의 발표논문을 다른 연구자가 인용하는 횟수가 지난해 논문 1편당 3.97회였다"며 "이 정도면 국내 웬만한 대학의 연구수준에 다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 30년만에 핀 눈꽃

사실 1950년대 화장품 연구라는 건 외국제품을 가져와 똑같이 만들어보고, 이 정도면 됐다 싶으면 신제품을 만들어파는 수준에 불과했다. 故 서 회장은 인삼과 같은 한방원료로 화장품을 만들고 싶었다. 화장품 선진국과 견줄만한 핵심기술 하나쯤은 갖춰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66년 세계 첫 한방화장품인 'ABC인삼크림'이 나왔다. 하지만 인삼 특유의 냄새를 지우지 못했고, 발랐을 때 자극이 있었다. 아모레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73년 인삼 사포닌을 원료로 한 화장품 '진생삼미'를 내놓았다. 이 제품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감을 얻은 故 서 회장은 한방화장품 개발에 더욱 힘을 쏟아 1987년 눈꽃 같은 피부를 선사한다는 뜻의 '설화(雪花)'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아모레는 한방 화장품의 진수로 꼽히는 '설화수'를 내놓는다. 중국인들이 줄지어 구입한다는 그 화장품이다. 지난해 매출액이 800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설화수가 나오기까지 30년 이상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설화수는 아모레가 켜켜이 축적한 성공과 실패가 피운 한 송이 꽃이다.

 

▲ 아모레의 히트상품인 한방화장품 '설화수'. 그 모태가 된 것은 1966년 내놓은 'ABC인삼크림'이다. 무려 30년의 노력 끝에 설화수가 나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 "힘들더라도 역사를 쓰겠다"

"힘이 들더라도 우리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스토리(이야기)'가 모여서 시간이 흐르면 '히스토리(역사)'가 된다."

지난 9일 경기도 오산 아모레 공장에서 열린 '창립 70주년 미디어 간담회'에서 서경배 회장은 해외시장을 공략할 때 외국 고급브랜드를 인수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 같이 답변했다. 단숨에 인지도를 높이는 편한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부의 힘을 믿고 차근차근 발을 내딛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였다. 궁색한 공간에서 출발한 연구실이 전세계 처음으로 한방화장품 시대를 열었듯 말이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이 세상에는 성장하는 산업도, 쇠퇴하는 산업도 없다. 오로지 성장하는 기업과 쇠퇴하는 기업만 있다." 혼란스러운 해방정국과 뒤어어 터진 전쟁 속에서도 회사를 키운 아버지(故 서성환 회장)의 '스토리'를 곁에서 들으며 깨달은 서 회장의 경영철학 같았다.

 

▲ 故 서성환 회장의 아들인 서경배 회장은 '스토리'를 강조했다. 어렵더라도 하나하나의 스토리가 쌓이면 역사가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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