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파랬고 햇볕은 따뜻했습니다.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날씨였습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등장을 기다리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복귀하기 딱 좋은 날씨네"라는 우스갯 소리가 나왔을 정도니까요.
17일 아침부터 수원 광교 'CJ블로썸파크' 입구에는 취재진들이 몰렸습니다. 이재현 회장의 등장은 그만큼 관심사였습니다. 4년간의 공백을 깨고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2013년 구속된 이후 언론에 공개된 이 회장의 모습은 늘 초췌했습니다. 선천적인 유전병인 샤르코 마리 투스(CMT)병과 신장 질환을 앓고 있는 이 회장은 수척한 모습으로 휠체어에 탄 사진 밖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난히 앙상한 다리는 많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이 회장이 이날 행사참석을 시작으로 경영복귀를 하는터라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관심이 컸습니다.
취재진에게 공표된 이 회장의 등장 시간은 오전 10시 40분. CJ블로썸파크 내부에서 진행되는 그룹 행사들이 끝난 이후 휠체어를 타고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취재진 사이에 돌았습니다. CJ블로썸파크 앞 마당에는 기념식수 행사를 위한 무대가 소박하게 마련돼 있었습니다.
▲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CJ그룹은 이번 이 회장의 복귀를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회장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이 회장의 동선은 언제나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회장의 사진은 언론사에서도 무척 귀한 자료입니다. 그런 그가 수많은 취재진 앞에 서야하니 그룹 입장에서는 고민이 컸습니다.
당초 CJ그룹은 이번 행사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부 행사인데다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 회장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초 행사를 문의했을 당시 CJ그룹에서는 "죄송하지만 행사는 철저히 통제돼 입장이 불가능합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룹에서도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잇따라 취재 의뢰가 오고 그룹 홍보실 전화통에 불이나자 CJ그룹은 결국 방향을 바꿨습니다. 행사는 공개하지 않되 이 회장의 기념 식수 행사는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이 회장에게도 그렇게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행사 일부 공개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바빠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념 식수장 무대였습니다. 이 회장의 건강 상태가 호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걷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존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보니 무대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문제였습니다. 이 회장이 지팡이와 부축을 받아 힘겹게 단상을 오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판단한 CJ그룹은 결국 단상 주변에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습니다. CJ그룹 관계자는 "오늘 행사 공개 문제로 내부에서도 고민이 많았다"며 "부분 공개로 방향을 바꾸면서 준비를 많이 했다"고 귀띔했습니다.
▲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이 회장을 기다린 지 한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 회장이 등장하기로 한 쪽문으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CJ블로썸파크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이었습니다. CJ블로썸파크는 CJ제일제당의 각 부문 연구소들을 한데 모은 곳입니다. 5000억원을 들여 2년전에 완공했지만 이 회장의 부재로 개관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CJ제일제당은 CJ그룹의 근간입니다. 평소 이 회장은 연구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만큼 CJ불로썸파크 개관식은 여러모로 이 회장의 복귀 무대로 적합한 이벤트였습니다. 밖으로 나온 연구원들은 삼삼오오 기념 식수 무대 앞에 모여섰습니다. 모두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 회장을 기다렸습니다.
10여분이 지난 뒤 쪽문 앞이 부산스러워졌습니다. 그리고 휠체어를 탄 이재현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부인인 김희재씨와 이채욱 CJ㈜ 부회장, 김철하 CJ제일제당 부회장, 박근태 CJ대한통운 사장 등이 수행했습니다. 사원 대표 2명도 함께 이 회장의 휠체어를 뒤따랐습니다.
회색 양복을 차려입은 이 회장은 무척 편안해보였습니다. 문밖을 나선 이후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념식수 장소로 이동하면서 이 회장은 잠시 CJ블로썸파크를 올려다 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감개무량한 듯 건물을 바라봤습니다.
▲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단상에 오른 이 회장은 모여 있던 연구원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박수가 터져나왔고 그는 환히 웃었습니다. 휠체어에서 일어설 때에는 주위의 부축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걷는 것이 불편해보였습니다. 하지만 행사가 시작되고 기념 식수가 진행될 때까지 그는 주변의 도움없이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이날 이 회장은 CJ블로썸파크에 '오엽송(五葉松)'이라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CJ그룹에서는 "연구원들의 지치지 않는 열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엽송'의 의미는 '다섯개의 잎으로 된 소나무'라는 뜻입니다. CJ블로썸파크에는 CJ제일제당의 5개 부문의 연구소가 입주해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해봤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이 회장이 휠체어에 앉았습니다. '이제 행사가 끝났구나'하고 생각할 무렵 돌발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박수를 치고 있던 연구원들 사이에서 갑자기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이 회장을 향한 반가운 마음에 연구원들이 큰 소리로 이 회장의 복귀를 축하한 것입니다. 이 회장은 연구원들을 향해 정말 환하게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이 회장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취재진에게도 손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습니다. 취재진 사이에서 "한말씀 해달라"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그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순간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년만에 되찾은 웃음과 표정만으로도 이 회장의 심리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이 회장이 등장해서 기념식수를 하고 퇴장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 행사는 차분하고 조용히 진행됐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만난 CJ그룹 고위 관계자는 "코 끝이 찡하고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습니다.
오너 부재로 CJ그룹은 그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투자는 줄었고 사업은 고만고만했습니다. CJ직원들은 종종 망망대해에서 방향타를 잃은 배처럼 4년을 표류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선장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회장은 비공개 내부행사에서 임직원들에게 "2010년 제2도약 선언 이후 획기적으로 비약해야 하는 중대한 시점에 그룹경영을 이끌어가야 할 제가 자리를 비워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글로벌사업도 부진했다. 가슴 아프고 깊은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합니다.
이재현 회장과 CJ 임직원들의 표정을 보며 문득 작년말 CJ 채널인 TVN에서 방송된 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 공유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속절없이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