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낮게…'. 한쪽이 낮추면 다른 한쪽은 더 낮춥니다. 이 경쟁을 지난 14년간 해왔습니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의 소주 알코올 도수 낮추기 경쟁 이야기입니다. 최근엔 하이트진로가 1년여 만에 주력제품인 '참이슬 후레쉬'의 알코올 도수를 낮췄습니다. 그러자 업계의 시선은 자연스레 롯데주류로 쏠렸습니다. 과연 롯데주류가 이번에도 도수 낮추기 경쟁에 뛰어들지가 관심사입니다.
소주 알코올 도수 낮추기 경쟁은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두산주류는 신제품 '처음처럼'을 선보입니다. 처음처럼의 알코올 도수는 20도였습니다. 두산주류가 처음처럼의 알코올 도수를 20도로 맞춘 것은 하이트진로의 참이슬 후레쉬를 겨냥한 전략적인 조치였습니다. 참이슬 후레쉬의 알코올 도수가 21도라는 사실을 감안해 그보다 낮은 도수로 '부드러운 맛'을 강조한 겁니다.
두산주류의 이 전략은 통했습니다. 한층 순해진 소주에 소비자들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그러자 이번에는 하이트진로가 나섰습니다. 같은 해 하이트진로도 참이슬 후레쉬의 알코올 도수를 19.8도로 낮췄습니다. 처음처럼의 인기를 차단하겠다는 심산이었던 겁니다. 국내 소주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하이트진로로선 처음처럼의 낮은 도수 전략이 거슬렸을 겁니다. 그래서 맞불을 놓은 셈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주 알코올 도수 낮추기 경쟁은 이후로도 계속됐습니다. 지난 2009년 두산주류가 롯데로 매각된 이후에도 말이죠. 롯데주류도 주력인 처음처럼의 확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처음처럼의 알코올 도수를 낮췄습니다. 이에 대응해 하이트진로도 같이 알코올 도수를 낮추면서 지금까지 그 경쟁이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경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2007년 하이트진로와 두산주류 모두 각 주력 제품의 알코올 도수를 19.5도로 낮춘 후 약 5년여 동안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두 업체 모두 알코올 도수를 19도로 낮추면서 다시 경쟁을 시작했죠.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2014년입니다. 이때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는 한 해에 두 번이나 알코올 도수 낮추기를 단행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난해 이번에는 하이트진로가 먼저 도수를 낮췄습니다. 종전 17.8도였던 참이슬 후레쉬의 알코올 도수를 17.2도까지 낮췄습니다. '저도주(低度酒)' 트렌드에 발맞춘 조치였습니다. 그러자 롯데주류도 나섭니다. 처음처럼의 도수를 17도로 조정하면서 다시 경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한동안 조용할 것 같았던 두 업체간 경쟁에 다시 불을 댕긴 건 하이트진로였습니다. 하이트진로는 최근 참이슬 후레쉬의 알코올 도수를 17도까지 끌어내렸습니다. 도수를 조정한지 1년 만입니다. 이제 참이슬 후레쉬와 처음처럼의 알코올 도수는 같아졌습니다. 1924년 처음 선보인 진로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35도였던 걸 감안하면 95년 만에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절반으로 떨어진 셈입니다. 그 세월 동안 소비자들의 입맛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업계에선 소주의 알코올 도수 하한선을 16도로 보고 있습니다.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14도인 만큼 소주는 그보다는 높아야 합니다. 소주의 경우 알코올 도수를 낮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알코올 도수는 낮추되 소주 특유의 풍미를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것이 기술력입니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가 지속적으로 알코올 도수를 낮추면서 이제 양사가 더 낮출 수 있는 여력도 크게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롯데주류의 대응이 관심사입니다. 이번에도 롯데주류가 하이트진로의 알코올 도수 낮추기에 대응해 또다시 경쟁에 나설지가 무척 궁금해집니다. 사실 그동안 롯데주류는 후발주자였던 만큼 마케팅 포인트를 하이트진로보다 낮은 도수의 소주로 잡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 발목을 잡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하이트진로가 낮추면 롯데주류도 낮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롯데주류 내부에서도 '언제까지 하이트진로에 끌려다녀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나왔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 만큼 롯데주류의 고민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롯데주류는 하이트진로의 소주 도수 낮추기에 대응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즉 처음처럼은 지금처럼 17도로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롯데주류가 종전처럼 하이트진로의 도수 낮추기에 대응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롯데주류의 처음처럼 판매량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서입니다. 현재 국내 소주시장은 하이트진로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뒤를 롯데주류가 쫓고 있는데 그 격차가 좀 나는 편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지방 소주업체들이 고전하면서 그 틈을 롯데주류가 치고 들어갔습니다. 그 덕에 점유율이 꽤 오른 상태입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현재 롯데주류의 소주 라인업엔 알코올 도수 16.5도의 '처음처럼 순한'이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처럼의 알코올 도수를 더 낮추면 처음처럼 순한과의 차별점이 희석됩니다. 더불어 소주 라인업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하이트진로의 17도 공격에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지난 14년간 경쟁의 역사 가운데 참이슬 후레쉬와 처음처럼의 도수가 같았던 경우는 세번 있었습니다. 2007년(19.5도), 2012년(19도) 그리고 올해(17도)입니다. 롯데주류가 알코올 도수 조정에 나서지 않기로 한 데에는 일종의 자신감도 있습니다. 처음처럼을 찾는 마니아 소비자층이 예전보다 두터워진 만큼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제품으로 승부하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롯데주류 관계자는 "처음처럼의 판매량이 성장세에 있어 굳이 알코올 도수를 조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그동안은 후발주자로서 마케팅 포인트를 하이트진로보다 낮은 도수의 부드러운 맛으로 잡았지만 앞으로는 우리 제품이 가진 고유의 경쟁력으로 승부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 발목을 잡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물론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도수 낮추기 경쟁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롯데주류의 이번 행보는 꽤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브랜드 충성도가 높기로 유명한 국내 소주시장에서 후발주자가 제품으로 승부수를 던지겠다고 나선 건 확실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옥죄고 있던 매듭을 풀고 본격적으로 경쟁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롯데주류의 향후 행보가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