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
품종 좋은 쌀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진행해오던 저자는 우연히 식물에 발견한 돌연변이 유전자가 사람의 질병 관련 유전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998년 식물의 콜레스테롤 합성에 관여하는 돌연변이 유전자 DWF5와 DWF12를 발견하면서다. DWF5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희귀 유전병과 관계가 있었다.
스미스 렘리 오피츠 증후군(Smith Lemli Opitz syndrome, SLOS)은 콜레스테롤 생합성에 문제가 있어 생기는 병이다.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콜레스테롤 합성에 문제가 있어 SLOS를 앓는 환자는 뇌가 작은 소두증이나 손가락이 보통보다 많은 다지증, 정신지체와 발달장애 등을 겪는다. 저자가 DWF5와 DWF12를 찾았을 당시에는 아직 사람의 유전자 지도가 다 그려지기 전이었고 SLOS가 유전자 문제로 발생한다는 것도 알려지기 전이었다.
진화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기로 했을 뿐 식물과 동물의 뿌리는 같다. 사람에게 있는 질병 관련 유전자 289개를 조사했더니 그 중 139개가 식물연구의 모델식물인 애기장대에서도 나왔다. 애기장대의 키를 작아지게 만드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사람에게 SLOS 질병을 일으킨 것이다. 원인을 찾았으니 SLOS를 고칠 수 있게 됐을까?
저자는 여기서 생각을 달리 한다. 과학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연구실을 문을 열고 기업이 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컨테이너로 된 식물공장에서 항체 의약품을 만들기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
허셉틴, 키트루다처럼 유명한 면역항암제들이 바로 항체 의약품이다. 항체 의약품은 사람의 면역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항체를 의약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암이나 희귀 난치성 질환에 효능을 보여주지만 기본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놀라운 치료 효과를 보여주는 허셉틴으로 1년 동안 치료를 받으려면 많게는 수천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항체 의약품은 높은 수준의 생명과학과 생명공학, 의학과 약학 연구의 결정체다. 연구개발과 임상시험에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비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항체 의약품은 유전자를 조작한 동물세포를 대량으로 배양해, 이 동물세포가 만들어내는 항체 물질을 정제해서 만든다. 원하는 약을 만들어내는 동물세포를 배양하고, 약물을 정제하는 데 첨단 장비와 고급 인력이 필요하다. 개발과 생산에 모두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소출이 많은 품종의 벼를 만들려다 희귀 난치병 원인 유전자를 찾아낸 저자는 이제 항체 의약품을 '비싼 약'에서 '기적의 약'으로 바꾸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동물세포가 아닌 식물에서 항체 의약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환자 개인에게 최적화된 항체 의약품을 컨테이너 한두 동 규모의 식물공장에서 만들어야 내야 한다.
원래부터 환자의 수가 적었던 희귀 난치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규모의 경제 때문에 많은 환자에게 처방하는 항체 의약품 생산을 중심으로 공장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조건에서 거대한 규모의 공장이 소수 환자를 위한 약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그런데 항체 의약품을 환자 맞춤형으로 소량으로 만들어낸다면, 그것도 컨테이너 한두 동에서 식물을 길러내고 정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으로 개발해낸다면 값비싼 항체 의약품의 가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 식물에서 항체 의약품을 개발하기까지의 과정뿐만 아니라 항체 의약품을 '비싼 약'이 아닌 '기적의 약'으로 만들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
도서명 《컨테이너에 들어간 식물학자》/ 펴낸 곳 바이오스펙테이터/ 132쪽 / 1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