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에도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가 드리우고 있다. 고물가·고금리로 불경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엔데믹에 대한 기대감도 급속도로 식어가고 있다. 소비자들은 '무지출', '짠테크(아낀다는 뜻의 짠+재테크)'에 골몰하는 중이다. 문제는 R의 공포가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원재료 가격이 폭등하면서 식품업계는 다시 가격 인상을 고민 중이다. 고물가를 잡으려는 고금리 정책은 소비 위축 우려를 낳고 있다. 첩첩산중이다.
대형마트 슈퍼마켓 '직격타'
유통 채널에 빨간불이 켜졌다. 소비 심리가 꺾이고 있어서다. 대한상공회의소의 3분기 소매유통 경기전망지수(RBSI)에 따르면 온·오프라인 유통업체의 기대 지수가 일제히 하락했다. 백화점(111→97), 대형마트(97→86), 슈퍼마켓(99→51), 온라인쇼핑(96→88) 등 모든 업종에서 하락세가 나타났다. 유일하게 편의점(96→103)만 기준치(100)를 웃돌았다. 경기전망지수는 기준치인 100 이하면 경기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는 기업이 더 많다는 의미다.
특히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의 타격이 클 것으로 예측됐다. 높은 생필품 가격에 소비자들이 장보기를 최소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반면 백화점은 상대적으로 여파가 적을 것으로 예상됐다. 소득수준이 높은 소비자층이 '럭셔리 소비'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아서다. 눈여겨볼 점은 편의점이다. 편의점은 불황에 도시락이나 간편식품을 찾는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실제로 물가는 예상보다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올해 1월 3.6%, 2월 3.7%에서 3월 4.1%로 급등했다. 4월에는 4.8%로 상승 폭이 더 커졌다. 5월에는 5.4%로 5%선마저 넘어섰다. 6월에는 6.0%로 곧바로 6%대로 올라섰다. IMF 이후 24년 만에 최고치다. 물가 상승 압력은 추석 등 명절 수요가 몰리는 7~8월에 더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불황형 소비도 늘고 있다. 짠테크와 '런치플레이션(lunch+inflation)'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위메프에 따르면 최근 3개월 간(4월8일~7월7일) 도시락 관련 상품이 전년 대비 80% 이상 증가했다. 모든 제품을 5000원 이하 균일가로 파는 다이소의 매출도 늘었다. 최근 3개월 간 다이소의 매출은 13% 증가했다. 특히 식품 매출이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경기 침체, 식품업계도 위협
식품업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원래 식품업은 인플레이션의 수혜업종으로 꼽힌다. 물가 상승이 매출 증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서다. 문제는 '스테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고물가와 저성장이 지속되면 소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원재료 수입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도 변수다. 밀과 쌀, 유지류 등의 가격이 오르고 있다. 수급도 불안하다.
식품업계는 추가 가격 인상에 나서고 있다. CJ제일제당은 다음 달부터 식용유와 스팸 가격을 인상할 예정이다. 동원F&B도 참치 통조림과 리챔 가격을 올린다. 치킨 업계도 들썩이고 있다. KFC는 지난 12일부터 일부 제품 가격을 200∼400원씩 인상했다. 밀가루를 주재료로 하는 라면·제과 업계들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가격 인상은 소비심리를 더욱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대외 리스크에 조직 슬림화에 나서는 곳도 늘고 있다. 이달 초 롯데그룹은 롯데제과와 롯데푸드의 합병 법인인 '롯데제과'를 출범했다. 최근 오뚜기도 계열사인 오뚜기라면지주와 오뚜기물류서비스지주를 흡수 합병키로 했다. 금리 상승과 인플레이션 등 불확실성이 커지자 조직 효율성을 키우고 선제적으로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식품 업계 관계자는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앞으로 자금 시장은 더 얼어붙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계열사 통합으로 빠른 시일 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차원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원료 통합 구매 등 가격 경쟁력을 극대화하겠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라면서 "그만큼 식품 업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더욱 짙어지는 'R의 공포'
'R의 공포'는 앞으로도 더욱 짙어질 전망이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현상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 하지만 금리 인상은 이자 부담을 높여 기업의 투자를 감소시키고 가계 부채 부담을 키운다. 고물가·고금리가 경기 침체를 낳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전 세계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변수도 더욱 커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7개월째로 접어들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 세계적인 작황 부진도 겹쳤다. 원재료 수급 문제에 따른 물가 상승은 좀처럼 쉽게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고환율도 문제다. 현재 환율은 13년 만에 처음으로 1300원대를 넘어섰다. 환율 상승으로 원재료 수입 비용이 늘어 국내 식품 기업들의 부담도 한층 커질 전망이다.
다시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19도 변수다. 이날 0시 기준 기준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9만9327명을 기록했다. 코로나19 재유행은 국내 경제에 치명적이다. 정부는 당장 거리두기 강화 등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소비심리 위축은 불가피하다. 고물가로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 코로나 재확산은 소비심리를 더욱 냉각시킬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경기 침체 공포에 리오프닝 기대가 희석되는 것이 가장 뼈아프다. 업계 관계자는 "저성장과 고물가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외출을 줄이고 식품과 생필품 위주로 소비하는 경향이 커진다"며 "이는 리오프닝 효과를 상쇄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소비심리 둔화와 함께 직면하게 되는 물류비와 제조원가 상승은 마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