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업계가 정부의 '한 마디'에 들썩이고 있다. 지난 18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라면 가격 인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다. 사실상의 가격 인하 지시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주요 라면 제조사들이 라면 가격을 내린 건 이명박 정부 시절인 지난 2010년이 마지막이다. 당시에도 김동수 기획재정부 차관이 "밀가루 값이 내린 만큼 업체들이 라면, 빵 등 주요 품목 가격을 내려주길 원한다"고 발언한 뒤 릴레이 가격 인하가 이뤄졌다.
2년 연속 인상은 못 참지
농수산유통공사(aT)에 따르면 국제 밀가루 가격은 올해 들어 하향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6월 톤당 371.4달러였던 국제 밀가루 가격은 올해 6월 229.6달러로 38.2% 내렸다. 추 부총리가 라면 가격 인하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사실 현재 가격 '정상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3년 전인 2020년 6월 국제 밀가루 가격은 톤당 183.1달러로 지금보다 20% 저렴했다. 코로나19로 임한 물류 대란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생산 감소 영향이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가격 인하 압박에 나선 것은 라면업계가 이 사이 2차례나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2021년 오뚜기를 시작으로 라면 4사가 모두 가격을 10% 이상 인상했다. 이때만 해도 4년에서 10년 만의 가격 인상이었던 만큼 반발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업계 1위 농심이 평균 11.3% 인상을 또 한 차례 단행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2년 연속 가격 인상은 라면 업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팔도도 9.8% 인상에 나섰고 눈치를 보던 오뚜기와 삼양식품도 곧바로 인상 카드를 꺼내들었다. 2년 새 라면 가격이 20% 이상 올랐다.
너무 많이 올렸나
정부가 특별히 라면을 가격 인하 대상으로 지목한 건 라면이 대표적인 '서민 품목'이라는 점 때문이지만 가격 인상 후 주요 제조사들의 실적이 눈에 띄게 회복됐다는 점도 중요했다.
가격 인상이 이뤄졌던 지난해 3분기 농심은 매출 8130억원, 영업이익 273억원을 기록하며 영업이익률이 3.4%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격 인상이 온기 반영된 올해 1분기에는 영업이익률이 7.4%로 치솟았다.
농심뿐만이 아니다. 같은 기간 오뚜기는 영업이익이 442억원에서 654억원으로 늘면서 영업이익률도 5.4%에서 7.6%로 2.2%포인트나 늘었다. 삼양식품도 9.1%에서 9.7%로 반등했다. 가격 인상 효과를 제대로 누린 셈이다.
현재의 실적에 원재료 가격 하락세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반기로 갈수록 원가 부담이 낮아지며 실적 개선폭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메리츠증권은 농심의 올해 영업이익을 전년(1122억원) 대비 67% 늘어난 1869억원으로 전망했다.
2010년 보면…비슷하지만 다른 점
지금 상황은 라면 제조사들이 마지막으로 가격 인하에 나섰던 2010년을 떠올리게 한다. 2007년 국제 밀가루 가격 급등 영향에 라면 가격이 올랐고, 2008년 이후 시세가 안정되면서 정부가 제조사에 가격 인하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2009년까지만 해도 라면 제조사들은 "가격 인하 계획이 없다"고 버텼다. 밀가루 가격은 내렸지만 다른 원재료 가격이 여전히 높다는 게 이유였다. 기업들이 가격 인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공정거래위원회까지 나섰다. SPC와 농심 등 시장 지배적 사업자를 거론하며 모니터링에 나섰다.
결국 2010년 1월 삼양식품이 6.7% 가격 인하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백기를 들었다. 연초 SPC가 빵 가격을 내린 데 이어 라면 업계에서도 가격 인하를 결정한 기업이 나왔다. 2월 초엔 농심, 오뚜기도 가격 인하에 동참했다.
현재 상황과 다른 점도 있다. 2010년에는 라면 제조사들의 가격 인하에 앞서 대한제분, CJ제일제당 등 밀가루 제조업체들의 가격 인하가 선행됐다. 라면 제조사들은 제분업체들로부터 밀가루를 매입하는 만큼, 국제 밀가루 가격과 비용이 직접 연동되지는 않는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제 밀가루 가격이 떨어졌다는 것만으로 라면 가격을 내리라는 것은 과도한 통제"라면서도 "정부 의지가 강한 만큼 내부적으로 검토는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