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맥주 시장 규모는 약 4조원 안팎입니다. 2010년대 중반에 이미 4조원을 훌쩍 넘었다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4조원을 오가고 있죠. 3조원 수준인 소주보다 크게 앞서는, 1위 주류입니다. 다른 시장 중에는 제과 시장이 비슷한 4조원 수준이고요. 라면 시장은 절반인 2조원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큰 시장이지만 주류 대기업들의 선택은 매우 보수적입니다. 라거 외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대부분이 오비맥주의 카스와 하이트진로의 테라가 차지하는 몫입니다. 밀맥주나 에일은 거의 수입맥주나 소규모 크래프트 맥주에 의존하는 형국이죠.
실제 국내 대기업 맥주 제조사 중 자체 밀맥주 브랜드를 보유한 곳은 오비맥주가 유일합니다. 하이트진로는 맥주라고 부르기 조금 뭐한 발포주 '필라이트'를 통해 바이젠 제품을 한정판으로 선보인 적이 있지만, 금세 단종됐죠. 이후로는 명맥이 끊겼습니다.
소비자들이 밀맥주를 찾지 않는 건 아닙니다. 당장 최근 몇 년간 가장 '핫'했던 수제맥주 하면 첫손 꼽히는 곰표 밀맥주가 있죠. 3년간 6000만개 이상이 팔렸습니다. 국내 맥주 시장에 콜라보 맥주 붐을 이끈 것도 곰표 밀맥주입니다. 잘 만들면, 수요는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수입 밀맥주'가 너무 잘 나가서일 겁니다. 국내 맥주 시장에 다양성이 생기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 수입맥주 붐이 일면서입니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맥주라고 하면 누구나 카스와 하이트만을 생각했죠.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품질을 인정받은 수입산 밀맥주와 경쟁하긴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주류 제조사들은 '자체 개발' 대신 좋은 품질의 밀맥주를 수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오비맥주에서 호가든은 카스와 버드와이저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효자 브랜드입니다. 너무 잘 팔려서, 국내 생산까지 하고 본토 벨기에에서는 팔지 않는 맛까지 자체 개발해서 팔고 있죠.
하이트진로 역시 밀맥주 판매로 쏠쏠히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산 밀맥주 '크로넨버그 1664 블랑'이죠. 우리나라는 프랑스를 제외하고 크로넨버그1664 블랑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입니다. 편의점에서도 늘 호가든과 밀맥주 판매량 1~2위를 다툽니다. 하이트진로는 독일 1위 밀맥주 브랜드인 파울라너의 국내 판매권도 갖고 있습니다.
그간 국내 주류 기업들의 마케팅 포인트가 가정 시장보다는 유흥 시장에 집중돼 있었다는 점도 밀맥주에 소홀했던 이유가 될 겁니다. 유흥 시장에서는 밀맥주나 에일 등 맥주 자체의 맛을 즐기는 제품보다는 '소맥용' 맥주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국내 주류 대기업들은 판매량이 많은 라거를 대량 생산해야 수익이 나는 구조이기도 합니다. '만들어봐야 팔리지도 않을' 밀맥주 개발에 선뜻 나서기 힘든 이유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가정용 맥주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들의 생각도 차츰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전 7대 3 수준이었던 유흥 시장과 가정 시장 비중은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4대 6으로 역전됐다가 이제 5대 5정도로 균형이 잡혔습니다.
가정용 맥주 시장의 중요성이 높아진 거죠. 곰표 밀맥주의 약진은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밀맥주가 시장 판도를 바꾸고,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죠. 오비맥주가 '프리미어 오비 바이젠'에 이어 카스 화이트를 내놓은 것도 밀맥주 시장의 미래 가치를 본 행보일 겁니다.
'밀맥주 그까짓게 뭐라고' 그냥 맛있는 수입 밀맥주를 찾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밀맥주 브랜드 하나쯤은 있었으면 하는 게 또 K-맥주 마니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언제쯤 K-밀맥주의 시대가 올까요. 아직은 그저 기다려 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