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이 17년 만에 외부 출신 인사를 대표이사로 선임합니다. 주인공은 삼성전자 출신의 해외통이자 마케팅 전문가인 조용철 사장입니다. 조용철 대표이사 내정자는 내년 3월 정기주주총회를 거쳐 정식으로 대표이사로 선임될 예정인데요. 외부 인사가 농심 대표이사가 된 건 2008년 삼성SDI 고문으로 일하다 영입된 손욱 회장 이후 처음입니다.
글로벌 전문가
조용철 신임 대표는 1962년생으로, 1987년 삼성물산에 입사한 후 32년간 삼성그룹에 몸 담아 온 '삼성맨'입니다. 삼성전자에서는 글로벌 마케팅실을 거쳐 동남아 총괄 마케팅팀장, 태국 법인장 등을 맡았습니다. 해외 시장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갖춘 글로벌 마케팅 및 영업 전문가로 평가 받습니다.
조 대표가 농심에 입사한 건 2019년입니다. 당시 마케팅부문장 전무로 농심에 합류했는데요. 2022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영업부문장을 맡으며 농심의 국내외 영업 전반을 총괄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조 기업에서 영업과 마케팅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제품을 어떻게 알릴지와 어떻게 팔지가 사실상 함께 움직여야 하는 구조입니다. 특히 해외 시장에서는 현지 마케팅 전략과 유통망 확보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두 영역의 연계가 더욱 중요합니다.
조 대표는 삼성전자에서 글로벌 마케팅과 영업을 두루 경험했고요. 농심에서도 마케팅부문장에서 시작해 영업부문장까지 거치면서 이 두 영역을 모두 총괄했습니다. 최근 농심의 공격적인 마케팅 행보도 조 대표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 인기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의 콜라보레이션과 같은 시도들이 대표적입니다.
식품업계에서는 마케팅 전문가가 식품회사 대표이사에 오른 것에 대해 꽤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식품기업은 생산이나 재무 출신 인사들이 대표이사를 맡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업들이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서면서 트렌드가 바뀌고 있습니다. SNS를 활용한 바이럴 마케팅이나 현지 소비 트렌드를 읽어내는 감각이 필수가 됐죠. 과거에는 원가 관리나 생산 효율을 중시했다면 이제는 시장 지향적인 시각을 가진 대표이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불닭'처럼
농심이 이 시점에 외부 인사, 그것도 해외 마케팅 전문가를 대표로 앉힌 것 역시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한 결정으로 풀이됩니다. 국내 라면 시장은 사실상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해외 시장의 중요성은 점차 커지고 있는데요.
농심은 올해 초 현재 40% 수준인 해외 매출 비중을 2030년까지 61%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주력 사업인 면 사업은 미국·멕시코·남미·중국·일본·영국·인도 등 7개 타깃 국가의 유통 환경 특성에 맞춘 글로벌 영업 전략을 추진하기로 했고요. 동시에 디지털 마케팅 역량 강화에도 나섰는데요. 마케팅이 라면 글로벌 사업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꼽힌 것이 눈길을 끌죠.
마케팅의 중요성은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의 성공 사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불닭은 단순히 인기 제품이 아니라 '문화 현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요. 출시 초기부터 SNS에서 매운 맛에 도전하는 챌린지 문화가 확산되며 자연스럽게 바이럴 마케팅 효과를 거뒀습니다. 이후에도 다양한 챌린지와 이벤트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노출시키면서 강력한 팬덤을 구축했습니다.
이 같은 마케팅을 발판으로 삼양식품은 10여 년 만에 해외 시장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현재 삼양식품의 해외 매출 비중은 80%에 달합니다. 해외 매출이 급증하면서 매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 중이죠.
농심도 수십 년간 공들여 해외 시장을 개척해왔습니다. 이렇게 농심이 닦아놓은 길에 삼양식품이 올라탄 효과도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최근 10년간 해외 성장세만 놓고 보면 삼양식품이 농심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농심 입장에서는 불닭이 트렌디하게 이슈가 되면서 '라면은 농심'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마케팅을 더 공격적으로 전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조용철 신임 대표가 앞으로 해야 할 역할 중 하나가 되겠죠.
세대 교체 신호탄?
업계에서는 조용철 대표 선임이 '오너 3세'인 신상열 부사장 체제를 준비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농심은 이번 인사에서 신상열 미래사업실장을 내년 1월 1일부로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는데요. 신 부사장은 신동원 농심 회장의 장남입니다.
신 부사장은 1993년생으로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후 2019년 농심 경영기획실 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2021년 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입사 2년 만에 구매담당 상무로 첫 임원 배지를 달았습니다. 농심의 최연소 임원이었죠. 이어 지난해 초 신설된 미래전략실장을 맡았고 연말에는 전무로 승진했고요. 이번 정기 인사에서 1년 만에 부사장까지 오르게 됐습니다. 입사 6년 만의 '초고속' 승진입니다.
이는 아버지인 신동원 회장과 비교해도 훨씬 빠른 속도입니다. 신 회장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79년 만 21세의 나이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에는 만 36세 나이로 전무에 오르면서 입사 15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했죠. 1996년 농심 계열사인 농심기획 대표이사에 오르며 첫 대표이사직을 맡았고요. 1997년에는 마침내 농심 대표이사에도 올랐습니다.
신상열 부사장은 아직 농심에서의 경력이 길지 않고 나이도 30대 초반이라 당장 승계를 거론하기는 이릅니다. 신동원 회장이 여전히 경영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신동원 회장이 만 39세에 농심 대표이사를 맡았다는 점, 신상열 부사장의 승진 속도를 고려하면 신 부사장 역시 조만간 대표이사를 맡을 가능성이 나옵니다. 조용철 대표가 과도기 전문경영인으로서 농심의 해외 성장 구조를 만드는 동시에 신 부사장이 더 많은 실무 경험을 쌓을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번 인사에서는 창업 세대와 함께한 '농심맨'들의 퇴임도 눈에 띕니다. 박준 농심홀딩스 대표와 이병학 농심 대표가 모두 퇴임하는데요. 박준 대표는 1981년 농심에 입사해 창업자 고(故)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을 모셨던 인물입니다. 이병학 대표 역시 1985년 입사해 39년간 농심에서 근무한 농심맨입니다. 농심이 농심맨 시대를 마무리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거쳐 3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셈입니다.
신 부사장은 현재 미래사업실을 이끌고 있습니다. 신사업을 발굴하고 해외 사업 확장 계획을 세우며 글로벌 인수합병 등을 검토하는 조직입니다. 조용철 대표가 중단기 성과를 만들어가는 동안 신상열 부사장은 농심의 장기 성장 동력을 만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총 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댓글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