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패션기업들이 인공지능(AI) 활용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있다. 화보나 영상 등 마케팅용 콘텐츠를 제작하던 수준을 넘어 수주와 상품 기획 등 핵심 의사결정 과정에도 AI가 도입되고 있다.
엑셀 지운 헤지스
LF 헤지스는 최근 진행한 글로벌 수주회에서 해외 바이어 주문 시스템을 AI 기반으로 전면 교체했다. 기존에는 바이어가 카탈로그를 보고 원하는 상품의 스타일 번호와 컬러 코드를 주문서에 직접 적어 넣어야 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현장에서 확인한 상품과 이후 엑셀 시트로 정리된 주문 내역이 맞지 않아 재확인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헤지스는 품평부터 수주까지 전 과정을 AI 기술로 연결했다. 수주회 현장에 진열된 제품에는 최소한의 정보만 표시하고 상세 스펙은 바이어가 태블릿의 디지털 룩북을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설계했다. 디지털 룩북에는 AI가 생성한 실제 제품 착장 이미지가 사용된다.
이 디지털 룩북은 수주 시스템과도 직접 연동된다. 바이어는 태블릿으로 상품별 핏과 소재, 스타일링을 살핀 후 원하는 이미지를 고르면 스타일 번호와 컬러, 소재 정보가 자동으로 연결돼 수량만 입력하면 발주까지 끝난다. 국가와 거래처마다 다른 통화와 환율, 언어도 시스템이 자동으로 연결한다.
헤지스는 상품 기획 단계에서 해외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도 AI를 시범 적용하고 있다. 담당자가 도쿄와 뉴욕, 유럽 등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AI로 현지 트렌드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현재 일부 상품 기획에 이런 AI 트렌드 분석을 시범적으로 활용 중이다.
데이터 쌓는 세정
세정그룹 역시 최근 상품 기획 업무에 AI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동안 상품 기획 과정에서는 각 상품의 속성을 담당자가 사진을 보고 하나하나 손으로 입력해야만 했다. 입력하는 사람에 따라 기준이 조금씩 달라졌고 데이터 축적 속도도 더디다는 문제가 있었다. 신상품 출고량을 정할 때는 정밀한 데이터 대신 기획자의 경험과 직관에 주로 의존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세정그룹은 기획부터 물량 운영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3단계 AI 시스템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우선 상품 속성 자동 추출 기능을 도입했다. AI가 상품 이미지를 분석해 색상, 소재, 패턴 등을 표준 데이터로 구현한다. 이를 통해 반복 작업을 줄이고 신뢰도 높은 상품 데이터를 자산화한다는 계획이다.
이어 오는 10월에는 유사 상품 자동화 기능을 추가할 예정이다. 추출한 속성 데이터와 이미지 유사도 분석을 결합해 과거 비슷한 상품의 판매 실적과 구매 데이터를 자동으로 찾아내는 기능이다. 기획자의 직관에 의존하던 결정을 데이터로 뒷받침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셈이다. 연내에는 판매량을 예측하는 모델도 도입한다. 적정 수량을 제때 출고해 재고를 줄이고 매출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특히 세정그룹은 외부에서 시스템을 사들이지 않고 사내 실무자가 자체 개발한 시스템을 사용한다. IT 전공자나 개발자가 아닌 실무자가 이 업무 중 겪은 불편을 반영해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자체 개발했다.
데이터화
패션기업들이 AI 적용 범위를 B2B 업무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데이터화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전통적인 패션기업들은 바이어 협상이나 출고량 결정 등을 담당자의 개인 경험에 주로 의존해야 했다. 업무 노하우 전수나 의사결정 과정 검증에도 한계가 있었다. AI는 이처럼 사람의 직관에 의존해야 했던 핵심 의사결정 과정을 데이터와 시각 자료로 시스템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LF와 세정그룹이 외부 솔루션 대신 자체 개발을 택한 점도 특징이다. 세정그룹은 상품 기획 담당자들이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시스템을 직접 설계했다. 헤지스 역시 크리에이티브 및 사업 조직이 주도해 품평과 수주 과정을 AI로 재편했다. 현장을 잘 아는 실무진이 구축한 덕분에 업무 적용도가 높다.
이런 시도는 AI가 단순 보조 도구를 넘어 핵심 의사결정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기 업무 비중이 높았던 전통 패션기업일수록 체질 개선과 효율화의 효과를 체감할 것으로 기대된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의 AI 도입이 마케팅이나 추천 서비스 등 B2C 영역에 국한됐다면 이제는 수주와 기획 등 B2B 핵심 밸류체인을 효율화하는 단계로 진화했다"며 "고비용·고재고 리스크가 큰 패션 산업 특성상 데이터와 AI를 활용한 의사결정 체계 구축이 브랜드의 수익성을 좌우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