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은 결국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했다. 판단은 금융감독원에 맡겼다. 부부싸움의 잘잘못을 경찰에게 가려달라고 떠넘기는 볼썽사나운 상황을 연출했다.
금감원의 특별검사에 따라 최소한의 시시비비는 가려질 전망이다. 하지만 금감원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국민은행은 내부적으로 최소한의 갈등 조정 장치마저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다시 한 번 생중계했다.
ING생명 사태에 이어 지배구조의 난맥상도 드러냈다. 일련의 과정에서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물론 임영록 KB금융 회장의 말발조차 전혀 먹히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미래 리더십에도 치명타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 전산시스템 교체 잠정 보류…갈등 봉합 실패
국민은행은 지난 30일 이사회를 열고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전산시스템 교체를 일단 보류했다. 전산시스템을 기존 IBM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 체제로 전환하는 절차도 중단했다.
겉으로 보면 이사회가 전산시스템 교체 결정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이 행장과 정병기 감사위원의 문제 제기를 수용한 구도다. 사외이사들이 지난 24일 이사회 결정을 뒤집고 한발 물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전산시스템 교체 보류가 아니라 잠정 보류란 결론은 사실상 갈등 봉합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양측은 금감원의 특별검사 결과가 나오면 전산시스템 교체 여부를 재차 논의하기로 했다. 금감원에 공을 넘긴 셈이다.
그러면서 금감원의 검사 결과에 따라 어느 한쪽은 치명타가 예상된다. 전산시스템 교체 결정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오면 이 행장과 정 감사가, 그 반대면 국민은행 사외이사진은 물론 KB금융 경영진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금융권에선 어느 한쪽이 로비를 받았거나 이권에 휘둘린 확실한 정황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일차적으로 정병기 감사가 가장 큰 책임론에 휘말린 것으로 보고 있다.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 행장이 “감사의 문제 제기를 막을 수 없었다”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어른이 없다…미래 리더십에도 치명타
집안싸움을 스스로 해결할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면서 KB금융 전반의 리더십에도 치명타가 불가피해졌다. 이건호 행장은 물론 임영록 KB금융 회장 역시 앞으로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란 관측마저 나온다.
이 행장은 이번 논란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최고경영자로서 설득이나 조정의 리더십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명색이 CEO가 전산시스템 교체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는데도 이사회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행장의 표현대로라면 정 감사도 완전히 통제권 밖이다. 이 행장은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 행장의 경영능력 자체에 의문도 제기된다. 학자 출신으로 원리원칙엔 충실했을진 몰라도 거대 조직의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아우르면서 경영 목표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리더십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일부에선 전산시스템 구매와 운영 체계를 잘 모르는 이 행장과 정 감사가 IBM에 휘둘린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임영록 회장도 같은 이유로 리더십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은행 사외이사진을 등에 업고 금융지주 차원에서 전산시스템 교체를 주도했지만, 결국 계열사 CEO에게 발목이 잡힌 꼴이 됐기 때문이다. “30일 이사회에서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달라”는 임 회장의 주문도 허공 속 메아리에 그쳤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은행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 것 같다”면서 “회장과 은행장, 감사, 이사회가 따로 노는 분위기에서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할 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