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DLF 사태 등으로 은행 업계가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 '금융기관이냐, 금융회사냐', '모든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겸업주의냐, 핵심에 집중하는 전업주의냐'하는 논란이 불거졌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전통적인 은행에서 변화할 것을 강하게 요구받고 있다. 혼란스러운 국내 은행의 현주소를 정리해본다. [편집자]
진옥동 은행장과 심성훈 대표이사.
신한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 수장의 명함을 보면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직책이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의 명함을 보면 '은행장'으로 돼 있고, 심성훈 케이뱅크 대표이사 명함을 보면 '대표이사(CEO&President)'라고 돼 있다.
두 사람 모두 대표이사이면서 은행장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시중은행장은 '행장'을 강조한 반면 인터넷전문은행은 '대표이사'를 부각하고 있다.
수장의 직책은 그 회사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시중은행은 금융기관으로서 은행의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2017년에 출범한 인터넷전문은행은 은행도 회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은행은 정부로부터 면허권을 받아 국민의 돈으로 운영되는 금융기관이면서 동시에 주주에게 이익을 배당해야 하는 금융회사다. 은행을 금융기관으로 볼 것인가, 금융회사로 볼 것인가는 오래된 질문이다.
2007년 윤증현 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장들과 간담회에서 "은행을 금융회사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은행이 공공성 중심의 금융기관에 머물러선 안되고 수익성 위주의 금융회사로 변해야한다는 점에서다.
해묵은 논쟁이지만 아직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내 은행에 요구되는 역할은 '회사'가 아닌 '기관'이 더 강조되고 있다.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금융업권인 만큼 이익증대보다는 금융소비자 보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물안에 머물러 있는 국내 금융회사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 이상 금융기관을 강조해선 안되는 목소리도 있다.
◇ "관치 꼬리표 못 뗐다"
은행이 금융기관 성격이 강하다보니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은행의 영업전략은 뒤바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은행의 기본이자 핵심 영업인 대출이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은행들의 대출 전략 변화는 정부의 입김이 은행업계에 얼마나 강하게 불고 있는지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는 최경환 전 부총리는 앞세워 경기부양책인 '초이노믹스'를 펼쳤다. 부동산 대출규제인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하자 은행들은 적극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취급했다.
'초이노믹스' 직전인 2013년 신한, KB국민, KEB하나, 우리, 농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규모는 총 270조5458억원에서 2016년 362조3315억원으로 3년여 만에 100조원 가량 늘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정책도 크게 바뀌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은 은행을 향해 "전당포식 영업을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동시에 최 전 위원장은 중소기업 대출을 확대하라며 '생산적금융'을 강조했다.
실제 2016년 이전 이들 은행의 연간 중소기업 대출 잔액 증가세는 연 3% 수준이었으나 정부의 생산적금융 강조 이후 연 8%까지 증가폭이 두배 가량 높아졌다. 그 사이 가계대출의 경우 증가세는 2% 수준으로 꺾였다.
은행 관계자는 "일단 은행은 정부 허가에 따라 사업을 펼치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춰 영업전략을 꾸릴 수 밖에 없다"면서도 "현재 은행을 둘러싼 규제가 선진국에 비하면 강하고 정부의 입김도 많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 정부 출범 직후 주요 은행들이 사외이사로 친 정부 인사를 영입한 점도 정부의 입김이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방증한다"며 "관치금융이라는 오명이 이어지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민환 인하대 글로벌금융학부 교수는 "은행은 강력한 규제산업이며 영업행위가 시스템에 의해 강력하게 규제되고 정부의 틀 안에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며 "다만 해외에 비해 우리나라는 상명하달식으로 제도나 규제를 정부차원에서 일방적으로 내려보내는 경향이 있으며 (정부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해)관치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특히 관료들은 규제를 완화하는 경우 후에 사고가 터지면 선배들이 책임지는 경우들을 봐 온 경험이 있고 이는 당국이 규제완화 등에 소극적이 되는 이유가 된다고 본다"며 "제도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순응하려고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은행 수수료 내기 아깝다?
일반 국민도 은행을 공공재적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 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 때문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은행들이 부실화되면서 정부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은행을 살리기 위해 '세금'이 투입된 것이다. 대부분 은행이 공적자금을 모두 상환하고 완전 민영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행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다.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보니 수수료도 제값을 받지 못한다.
대표적인 것이 타행이체 수수료다. 현재 국내 은행의 경우 100만원 미만 금액의 타행이체 수수료는 800~1000원 수준으로 대다수 시중 은행이 대동소이 하다.
반면 미국 씨티은행의 경우 2~5(2300~5500원)달러, 일본 MUFG 은행의 경우 220~660(2400~7100원)엔이다. 현재 환율을 기준으로 우리나라보다 최대 7배이상 높다.
기본적인 서비스 수수료가 높다보니 우리나라 은행에 비해 비이자이익의 이익 기여도도 높다. 올 상반기(2019년4월~9월) MUFG은행의 영업이익 1조9733억엔 중 비이자 이익은 1조3920억엔으로 기여도가 53%에 달했다. 국내은행들의 평균 비이자 이익의 영업기여도 19%의 2.7배 수준이다.
은행 관계자는 "국내 은행 대부분이 타행이체 수수료를 부과하긴 하지만, 주거래 고객일 경우 월 10회까지는 무료로 이체가 가능해 사실상 무료에 가깝다"며 "이를 인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고객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돼 쉽게 올리지 못했다. 은행의 서비스는 무료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은행업에 대해 공공재적인 역할을 많이 강조해 왔다"며 "은행연합회가 매년 은행들의 사회공헌을 종합해 보고서를 발간하는 것도 이같은 의식이 반영됐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반면 그간 은행들이 금융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는 '자기최면' 아래 영업전략을 다양화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공재적 성격때문에 수수료를 올리지 못한다는 주장보다는 그간 우리나라 은행들이 이자이익만으로도 충분히 이익이 나는 구조였기 때문에 수수료 등 비이자 이익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부분이 크다"며 "이 때문에 그간 기본적인 서비스를 무료나 저렴하게 제공하려던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금융환경이 이자이익만으로는 수익성을 끌어올리기 어려워진 점이 있어 수수료 인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라며 "이에 기본적인 서비스의 수수료를 인상하려면 고객들의 반발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공격적 해외진출·M&A로 탈출구 모색
은행은 '금융기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표적인 전략이 해외진출과 인수합병이다. 최근 은행들이 동남아 시장에 주목하고 공격적인 M&A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분석이다.
금융지주 관계자는 "사회가 은행에 바라는 것과 금융지주가 은행에 기대하는 것이 상충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은행의 공적인 성격이 좀 더 부각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지주 차원에서는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비은행 계열사 강화라는 카드를 꺼냈고 대표적인 것이 M&A"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금융지주 관계자는 "은행 뿐만 아니라 모든 금융사는 금융소비자 보호라는 틀 안에서 사업을 펼쳐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은행에게 가장 엄격한 잣대가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 잣대가 사업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결국 은행이 아닌 다른 계열사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금융지주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