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에서도 '디지털 전환'은 화두다. 보험연구원이 지난해 보험사 최고경영자(CEO) 3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CEO 92.1%가 향후 1년간 디지털전략(예산, 인력 등)의 중요도가 증가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디지털 전환을 최우선 과제로 꼽는 보험사들도 대거 등장하고 있다.
보험설계사로 대표되는 사람(人)과 각종 안내서·청약서·약관이 쓰여진 종이(紙)를 중심으로 하는 '인지(人紙)산업'이었던 게 보험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이 업계 안팎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보험업계에 디지털 전환은 쉽지 않은 숙제지만 피할 수도 없는 필수 과제인 것이다.
성장도 수익도 신뢰도도 '하락세'
국내 보험산업은 성장성과 수익성이 동반 하락하고 있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성장성 지표인 보험료수입(원수보험료)의 연평균 증가율은 생보와 손보가 각각 1980년대 34.7%, 21.1%에서 2010년대 3.5%, 6.1%로 떨어졌다.
주력상품인 개인보험 신계약 증가율은 2000년대부터 역성장에 빠졌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손보산업도 장기보험 신계약 증가율이 2010년대 들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수익성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반사이익 등 코로나19로 인한 반짝 증가를 제외하면 최근 10년간 정체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보험산업 당기순이익은 2010년 6조원과 2020년 6조1000억원으로 유사한 수준이다.
보험업에 대한 신뢰도 역시 바닥 수준이다. 금융감독원 민원에서 보험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보험 민원이 전체의 60%가량을 차지했다. 보험사와 소비자 간 정보 비대칭 등을 원인으로 한 신뢰 하락은 보험사에 보험료 인상 및 인수 지급 심사 강화 등 고비용을 초래해 효율성을 더욱 하락시킨다.
외부환경도 악화일로다. 인구 감소 및 고령화, 저성장 국면이 겹치면서 주요 고객층 감소와 장기적인 성장성 둔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발전과 규제개선으로 빅테크·핀테크 기업의 보험업 진출이 확대되며 새로운 경쟁구도도 나타난다. 그런데도 사업 경직성이 지속되는 탓에 전통 보험업의 지속가능성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급변하는 환경…생존전략=디지털
코로나19 이후 금융소비자들의 온라인 소비행태는 크게 늘었다. 보험에서도 편리함, 신속함을 갖춘 디지털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도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삼정KPMG 경제연구원은 "인슈어테크(Insurtech) 등을 통한 디지털화는 보험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보험의 전통 패러다임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직은 디지털 보험사조차 아쉬운 성적표를 받고 있다. 국내 1호 디지털 손해보험사인 캐롯손보는 손실 규모가 매년 확대되며 적자 폭을 키우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 2020년, 2021년 각각 381억원, 649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지난해 순손실은 795억원이었다. 국내 보험시장에서 디지털 전환이 쉽지 않은 과제임을 방증한다
그렇지만 보험업계가 당면한 저수익·저성장·소비자 신뢰도 하락 국면에서 디지털 전환은 곧 '생존의 열쇠'로 꼽힌다. 보험연구원은 "보험산업은 디지털 전환을 통해 정보 수집 및 분석을 고도화할 수 있게 되고 경제주체 간 정보 교환을 통해 정보 비대칭성을 완화, 산업의 효율성과 소비자 신뢰를 동시에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보험업계가 디지털 전환을 통해 소비자로부터 직접 취득한 데이터(내부 데이터)와 다른 사업자로부터 취득한 데이터(외부 데이터)를 결합, 분석함으로써 시장의 경계를 확대하고 시장을 세분화해 다양한 소비자 니즈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업모형의 효율성, 확장성, 유연성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게 보험연구원의 분석이다.
소비자에게도 이점이 있다. 디지털 전환을 통한 플랫폼 도입으로 보험사 및 보험상품 비교가 쉬워지게 된다. 이는 곧 보험사에 대한 정보 열세를 줄여 보험산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고 보험 상품에서 받는 효익도 키울 수 있게 된다.
메리츠화재 "디지털 전환 핵심은 '속도'"
보험업계에서 디지털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곳으로는 메리츠화재가 있다. 김용범 부회장의 '혁신' 진두지휘가 거침없다. 김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2015년 이후 △손익분석 △상품 개발 △가입설계 △인수심사 △보상업무처리 등의 속도와 품질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다. 혁신을 바탕에 둔 무서운 성장세는 손보업계 빅4 판도도 깨고 있다.
주력상품인 장기인보험(납입 기간 3년 이상으로 상해·질병 등을 보장하는 상품)을 중심으로 보험료 수익을 늘리고, 우수한 손해율 관리로 빠져나가는 보험금을 최소화해 실적을 개선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 뒤에는 디지털전환팀이 있다.
디지털전환팀은 메리츠화재 내에서 '어벤져스'로 꼽힌다. 제조업, 금융업 등 다양한 업종 출신 전문가들이 모였다. 스타트업 같은 분위기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보험업을 바라보면서 변화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개발한 '고성능 보험상품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상품·담보의 속성이나 보험료·준비금(책임 준비금)을 산출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직관적으로 정의한 것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장기보험상품 개발·개정 과정이 효율화됐으며, 관련 보험료와 준비금 산출에 소요되는 시간은 기존의 60분의 1로 단축됐다.
요율산출 역량 강화는 신상품 출시나 언더라이팅 측면의 역량 강화로도 이어진다. 디지털전환팀장인 김승욱 상무는 "디지털기술로 상품 개발과 운영, 이와 관련된 의사결정의 속도를 제고하는 것은 경쟁력 확보와 함께 소비자 보험 니즈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며 "보험 인수정책 관리, 보험약관 생성 시스템도 새롭게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보험업에서 디지털 전환이 갖는 의미는
▲ 인지산업이라고 불린 보험업이 디지털화하기 위해 경주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플랫폼에서의 상품 비교 서비스, 데이터에 기반한 보장분석·담보 추천 등 고객 접점에서의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보험상품 접근성 개선 등의 노력이 있었다.
업무 프로세스 전 과정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연결하고, 빅데이터 분석 역량을 확보하는 것은 합리적 경영 의사결정 및 새로운 보험상품이나 사업모델 개발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메리츠화재가 디지털 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이유는
▲ 디지털 전환은 정확하고 빠른 계산으로 변화가 필요할 때 신속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고 경영진의 포부와 의지가 동력이다. 김용범 부회장은 '프라이싱(가격책정)'을 금융업의 핵심이라고 짚고있다. 고객에게 장기보장을 약속해야 하는 상품 중심인 손해보험 시장에서는 디지털 전환이 필수적이다.
관련 작업은 디지털전환팀만이 아닌 IT(정보기술)팀, 장기고객팀, 장기보상부문, 일반·기업보험부문, 경영관리 등을 포함해서 전 부문에서 다각도로 진행하고 있다. 각 부문에서 기존에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일들을 디지털기술을 적용해 시도하고 있다는 얘기다.
- 주요 성과는
▲ 실제 손익 분석, 상품 개발에서 보상업무처리까지 각 영역에서 속도와 품질을 높이기 위한 혁신 작업들이 진행됐다. 또 AI(인공지능) 기반 대고객 음성봇 서비스, 디지털 ARS(자동응답시스템) 등 대고객 서비스 혁신도 있었다. 고객경험 TF(태스크포스) 조직을 대표이사 직속으로 두고 소비자 및 설계사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업도 지속하고 있다.
우리 팀의 고성능 보험상품 시스템은 상품 개정 작업을 효율화했다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상품 개발과 관련된 업무들을 통합 시스템화해 계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언더라이팅, 보험금 지급업무와의 연계 등 활용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기초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적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중으로 더 많은 영역에서 신기술을 접목한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