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들이 모였다. 과거 현대중공업을 세계 1위의 조선업체로 이끌었던 주인공들이다. 현대중공업은 현재 사상 최대 실적 악화에 노조의 파업까지 눈앞에 두고 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다. 이 위기를 돌파하는 것이 올드보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과제를 던져준 것은 뒷선에 물러나 있던 대주주 정몽준 전 의원이다. 그는 '친정체제' 구축을 카드로 빼들었다. 그의 '복심(腹心)'으로 불리는 이들을 불러 모았다.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전문경영인 체제다.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정몽준 전 의원이 전면에 나선 모양새다.
◇ 권오갑 사장의 귀환
권오갑 사장이 복귀했다. 지난 2010년 현대오일뱅크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지 4년만이다. 권 사장은 정몽준 전 의원의 직계 라인으로 분류된다. 정 전 의원과 독대하는 몇 안되는 인사다.
그런 권 사장의 복귀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정몽준 전 의원이 다시 경영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정 전 의원은 그동안 현대중공업의 경영에 큰 관여를 하지 않았다.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만큼 현대중공업은 승승장구해왔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2분기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했다. 노조도 19년 무파업 기록을 깨려고 하고 있다.

▲ 정몽준 전 의원은 지난 4월 서울시장에서 낙선했다. '야인(野人)'이 됐다. 돌아와보니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현대중공업이 위기상황에 처했다. 정 전 의원은 최측근인 권 사장을 그룹 전면에 배치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외형상으로는 소유와 경영 분리 원칙을 지켰지만 실질적으로는 정 전 의원이 현대중공업 경영 전면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
정 전 의원의 신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여당의 최고위원으로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올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사실상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돌아와서 보니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현대중공업이 위기에 처했다.
정 전 의원으로서는 현대중공업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됐다. 히지만 본인이 경영 전면에 나서기는 부담스럽다. 지금껏 지켜왔던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원칙에도 위배된다. 정 전 의원이 최측근인 권 사장을 현대중공업에 복귀시킨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외형상으로는 자신의 최측근들을 전면에 포진해 지금껏 유지해왔던 소유와 분리의 원칙을 지켰다"며 "하지만 실상은 본인이 직접 현대중공업의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정몽준 '친정체제' 구축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철저하게 전문 경영인 체제로 꾸려져 왔다. 지난 82년 5월부터 88년 4월까지 정 전 의원이 CEO를 맡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문경영인 손에서 성장했다.
정 전 의원은 이번에도 전문경영인들을 전면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핵심 보직을 맡겼다. 최길선 회장에게는 현대중공업의 핵심 사업이자 실적 하락의 주범이었던 조선·해양·플랜트를 맡겼다. 권 사장에게는 그룹 전반에 대한 관리를 주문했다.
과거와 달라진 것은 정 전 의원의 의중과 입김이 세지는 구조가 됐다는 점이다. 친정체제를 구축한 만큼 최 회장과 권 사장은 정 전 의원과 충분한 교감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정 전 의원의 생각이 과거보다 훨씬 많이 반영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 왼쪽부터 최길선 현대중공업 조선·해양·플랜트 총괄 회장,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 겸 그룹 기획실장, 문종박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부사장). 정몽준 전 의원은 위기 돌파의 해법으로 최측근을 중심으로 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향후 현대중공업의 사업 재편은 물론, 체질개선 등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
최 회장과 권 사장은 현대중공업을, 문종박 부사장에게는 현대오일뱅크을 맡긴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오일뱅크는 그룹을 지탱하는 양 축이다. 현대중공업은 자신의 직계 라인을, 현대오일뱅크는 직계 라인은 아니지만 소위 권오갑 라인으로 불리는 문 부사장을 선임했다.
문 부사장은 현대중공업 출신으로 대표적인 '재무통'으로 불린다. 지난 2010년 권 사장이 현대오일뱅크로 옮겨갈 당시 권 사장과 함께 움직였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문 대표는 권 사장처럼 직접적으로 정몽준 대주주와 관련은 없지만 권오갑 사장의 측근으로 현대오일뱅크를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 '후계승계' 속도 빨라지나
결국 정몽준 전 의원의 '믿을맨'들이 그룹과 핵심 계열사에 포진하게 된 셈이다. 일각에서는 현대중공업의 3세 경영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정 전 의원의 장남인 기선씨는 현재 현대중공업 부장으로 재직하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그동안은 나이가 어려 경영전반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이 위기에 빠졌다. 정 전 의원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까지 직접 위기 돌파에 나선 상황이다.
따라서 향후 기선씨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최근 현대중공업의 위기와 정 전 의원이 최측근들을 전면에 포진시키면서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넓히는 것은 후계 구도와도 연결된다"며 "3세 경영을 위한 준비에 속도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정 전 의원은 최근 현대중공업의 2분기 실적 악화와 노조의 파업 움직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중공업그룹 고위 관계자는 "대주주가 최근 현대중공업이 처한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 업계에서는 친정체제를 통해 정몽준 전 의원이 현대중공업에 전달할 메시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 전 의원이 어떤 메시지를 보내느냐에 따라 향후 현대중공업의 방향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또 다른 고위 관계자도 "지난 2분기 실적 악화로 내부적으로 시업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왔다"면서 "이 작업을 진행할 적임자로 권 사장이 꼽혔고 대주주가 최 회장에 이어 권 사장의 복귀를 직접 지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위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측근 뿐이라는 정 전 의원의 의중이 이번 인사의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정몽준 친정체제' 구축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친정체제'를 통해 정 전 의원이 어떤 주문을 내놓을지에 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몽준 전 의원은 '필승조'를 투입했다"면서 "그동안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정 전 의원이 '필승조'를 앞세워 현대중공업에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향후 현대중공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