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재계 총수들이 내놓은 신년사에 한결같은 표현이 눈에 띈다. 바로 '위기'다.
미국 금리인상과 중국 경제둔화 등으로 대외 변수와 내수침체, 가계부채 증가 등 내부요인들로 인해 올해 경제 역시 불확실성이 크다는 진단이다. 산업구조가 변화하며 주력 제조업들의 경쟁력이 하락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재계 총수들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생존전략의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살아남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며 경계의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이에따라 산업구조 변화에 맞는 미래 경쟁력 확보, 신성장동력 발굴과 육성, 내실 강화 등을 주문하는 모습이다.
◇4대 그룹 "경제상황 불확실"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 산업이 경쟁심화와 함께 구조적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기차 확대, 자율주행차 보급 등 기존 자동차의 패러다임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몽구 회장은 미래경쟁력 확보에서 해법을 찾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정 회장은 "그룹의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미래 경쟁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가장 먼저 R&D 투자를 대폭 확대해 자동차 산업의 기술 혁신을 주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올해는 국내외 경영환경이 상당히 불투명할 것"이라며 일과 싸워 이기는 기질을 의미하는 '패기'를 통해 이를 극복하자고 주문했다. 지난해 연말 혼외자 공개 등으로 구설에 올랐던 최 회장은 이날 신년회에 참석하며 본격적인 경영행보 재개를 예고했다.
최 회장은 "계열사는 실행력을 높이고 수펙스추구협의회는 시너지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솔직함과 신뢰의 기업문화를 확산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구 회장은 "우리 앞에 놓인 냉엄한 현실과 직면한 위기상황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며 선제적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산업 판도가 급변하고 있다"며 "자칫 안일하게 대처한다면 성장은 고사하고 살아남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사업구조 및 방식을 면밀히 파악해 근본적으로, 그리고 선제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지난해 연말이후 조용한 행보를 보였던 최태원 SK 회장이 4일 열린 그룹 신년회에 참석해 경영행보 재개를 알렸다. |
재계 1위인 삼성은 올해도 그룹 차원의 신년 하례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다만 주력계열사인 삼성전자 권오현 부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핀테크, 모바일 헬스 등 융합 분야에서는 산업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경쟁해야 한다”며 “새로운 경쟁의 판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과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변해야 살아남는다" 한 목소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역시 "지금은 새로운 성장을 위한 중요한 시점"이라며 "시대의 변화에 맞지 않는 기존의 사고와 관습, 제도와 사업전략은 모두 버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경영투명성 확보와 준법경영은 우리 그룹이 준수해야 하는 핵심적인 가치"라며 "그룹의 모든 경영활동은 이러한 근본적인 원칙에 맞추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기업 생존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된다"며 "올해는 철저한 위기 대응능력 배양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창출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 회장은 고객중심 경영과 함께 안전에 대한 중요성도 재차 강조했다.
최근 두산인프라코어 명예퇴직 등으로 논란에 휩싸였던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올해를 성장기반을 다지는 시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세계경제는 저성장이 지속될 것이고 추가적인 위협요인들이 예상된다며 "이럴 때일수록 선제적,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호경기를 맞은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 고성장이 예상되는 인도 같은 신흥국들에 대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하드웨어를 잘 만드는 것은 이제 기본이며 소프트웨어의 경쟁력을 통해 제조 및 제품, 서비스 경쟁력을 어떻게 차별화하느냐가 성장의 필수 요소가 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사업경쟁력 강화를 강조했다. 김 회장은 "올해를 혁신과 내실을 통한 지속적인 성장기반의 해로 삼아 일류 경쟁력 강화에 모든 에너지를 결집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올해는 그룹의 핵심사업 경쟁력을 글로벌 리더 수준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며 "더 이상 매출 1위, 생산량 1위가 목표가 되선 안되고, 품질과 수익성, 고객가치 1위 기업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CJ, 회장 공백 고민..금호, 제 2창업 강조
이재현 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으며 장기공백이 예상되는 CJ그룹은 손경식 회장 명의의 신년사를 통해 “글로벌 사업을 강화해 독보적인 1등이 되자”고 강조했다.
손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질적으로 독보적 1등으로 자리매김해나가자”며 “글로벌 역량을 갖춘 일류 인재를 확보하고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경영시스템을 구축하자”고 밝혔다.
그는 다만 “현재 이재현 회장의 건강이 매우 위중하고 절박한 상황”이라며 “임직원의 심려가 크고, 저 역시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덧붙였다. 이어 "임직원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룹의 성장을 위해 맡은바 소임을 다하자"고 당부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올해 경영지침으로 커넥트(Connetc)와 퓨처(Future)를 이어 만든 ‘커넥처(Connecture)’를 제시하며 "변화의 문이 닫히기 전에 미래 먹거리 발굴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또 논어의 ‘각득기소(各得其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를 인용하며 “어느 회사와 어느 부서, 어느 직급에 있든 각자의 몫을 온전히 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해말 금호산업 인수를 마무리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올해 경영방침으로 '창업초심(創業初心)'을 제시하며 "기본으로 돌아가 올해는 기필코 강하고 힘있고 멋있는 금호아시아나를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이윤·품질·안전'을 3대 경영목표로 제시하며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을 500년 영속기업으로 만들자"고 주문했다. 금호아시아나에서 독립한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계열분리로 인해 명확한 ‘좌표’를 확보하게 됐다"며 "이제는 강이 아닌 바다를 건너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감히 옛 방식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왔고, 그 길에서 실패를 겪어도 이겨내 후대에게 물려줄 정신이나 가치를 남긴다면 그것이 금호를 계승·발전시키는 진정한 유산일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