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투(夏鬪)의 계절이 왔다. 이 시기 대한민국 노사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하투의 계절이 돌아오면 한국 산업은 늘 패닉에 빠진다. 파업 때문이다. 이제 노조에게 파업은 연례행사다. 사측에게는 매년 겪는 홍역이다. 문제는 파업이 단순히 노사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청년실업 문제와 맞물리면서 세대 갈등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노사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파업이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와 영향,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위한 다양한 사례와 의견들을 짚어본다. [편집자]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는 '일자리'다. 기존의 일자리를 로봇과 기계에 상당 부분 내줘야 한다. 노조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다. 특히 노동 경직성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불성설이다. 국내 산업계가 '4차 산업 혁명' 논의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트렌드는 변하고 있다. 심지어 강성 노조 국가인 남부 유럽에서조차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경쟁력 잃어가는 한국
한국의 경제가 단기간 내에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선택과 집중' 덕분이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 구조를 바탕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했던 것이 주효했던 셈이다. 이런 전략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해야 했던 것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근로자들의 권익이었다.
눈부신 경제 성장과 더불어 한국의 정치 상황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경제 성장의 이면에 억눌렸던 욕구들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지금의 강력한 노조를 탄생시킨 주요 요인이 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급격한 '변화'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대표적으로 노동 경직성이 높은 국가로 평가 받는다. 많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 대해 우려하는 것 중에 노동 경직성은 늘 상위 순위로 꼽힌다. 외국의 눈에서 볼때 한국은 노조의 입김이 강한 국가다. 이는 반대로 기업하기 어려운 국가란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세르지오 호샤(Sergio Rocha) 전 한국GM 회장은 한국 노동시장 경직성이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끊임없는 임금 인상 요구와 종종 물가 상승률의 2배에 달하는 임금 인상 ▲비정규직 직원에 대한 정규직으로의 전환 압박 ▲매년 해야하는 임금협상 등을 그 예로 들었다.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가져오는 폐해는 이미 수치로도 잘 나타나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경쟁력평가’를 분석한 결과, 한국 노동시장의 효율성은 매년 순위가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다. 한국 노동시장 효율성 순위는 지난 2007년 24위에서 작년 83위까지 떨어졌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 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변화'다. 특히 노동시장의 변화가 전제돼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 한국의 노동시장은 경제와 정치 체계 변화의 산물이다.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송원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더 이상 노사 간 신뢰회복과 노동시장 효율성을 높이는 노동개혁을 지체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다.
◇ 남부 유럽에서 배운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부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노조의 힘이 강하다. 노조의 사회 참여는 물론 정치 세력화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 만큼 노조의 입김이 세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약 20년간 사회당이 장기 집권할 만큼 노동자 친화적인 정책이 자리잡은 곳이다.
하지만 이들 남부 유럽 국가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이들 국가의 노조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립만 해왔던 사측과 타협에 나섰고 경직된 노사관계 보다는 유연한 관계로의 전환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글로벌 경기 침체 지속에 따라 일감이 줄고 공장이 폐쇄위기에 몰리자 노조 스스로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이 싹텄다. 노조 이기주의가 아닌 같이 사는 '공생(共生)'을 받아들기 시작한 셈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르노와 이탈리아의 피아트다. 르노는 스페인 바야돌리드에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다. 르노가 본국인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에 생산공장을 가진 이유는 값싼 인건비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스페인은 더 이상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었다. 일감은 매년 줄고 생산량도 감소했다. 인건비가 더욱 싼 터키와 루마니아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 르노의 스페인 바야돌리드 공장 생산라인. 르노와 스페인 바야돌리드 노조의 노사상생 대타협 사례는 국내 노동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처음 노조는 르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적자를 감내하지 못한 르노가 감원카드를 꺼내자 파업으로 맞섰다. 스페인의 소도시 바야돌리드는 르노 공장의 파업으로 몸살을 앓았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노조는 고심했다. 결국 노조는 변화를 택했다. 임금 인상을 제한하되 고용은 보장받기로 했다. 노사간 빅딜로 스페인 공장은 살아났다. 르노삼성의 'QM3'가 현재 이곳에서 제작되고 있다. 'QM3'는 노사 대타협으로 받아낸 물량이다.
피아트도 유사하다. 한때 이탈리아 자동차 시장에서 절대 강자였던 피아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수입차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60%에 달하던 점유율은 반토막이 났고 회사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결국 피아트는 노조에 인력 구조조정을 제시했다. 노조는 반발했다. 노사갈등이 극심해지자 피아트는 해외 생산에 방점을 찍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노조는 줄어드는 일감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변화를 선택했다. 노조는 사측과 임금 인상 제한, 파업 금지, 전환 배치 허용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협약을 맺었다. 노동 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노사가 타협, 화합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이뤄냈다. 그러자 적자 연속이었던 실적이 흑자로 돌아섰다. 이탈리아 내 생산량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다.
◇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남부 유럽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국내 노조들도 남부 유럽의 노조들이 겪었던 상황과 유사한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다. 핵심은 같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달려있다. 남부 유럽의 노조들은 '타협'과 '양보'를 선택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노조들에게 아직까지 '타협'과 '양보'는 생소한 해법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의 부분 파업이 대표적인 예다. 현대차는 판매 부진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판매 부진 탓에 경영 실적도 좋지 않은 상황이다. 현대중공업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4년부터 지금까지 수조원의 적자를 입었다. 정부는 조선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할 채비를 갖췄다. 벼랑끝에 서 있는 셈이다.
▲ 업계 등에서는 한국의 노조도 남부 유럽의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전향적인 자세로 타협에 나서야한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노동시장 경직성이 더욱 공고해져 '4차 산업혁명'이라는 변화의 큰 물결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조언하고 있다. |
하지만 노조의 생각은 다르다. 회사 경영의 실패는 경영진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회사의 생사 여부와 상관 없이 내 것은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내것만 챙겼다간 회사와 노조 모두 공멸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과거 경제 발전에 집중한 나머지 근로자들의 희생만을 강요받았던 시기의 악몽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어쩌면 노조에게 궁극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수 있다. 이제는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 아예 없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가져가지 못하면 한국 산업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매년 떨어지는 한국 노동시장 효율성 순위를 높이고 조만간 현실이 될 '4차 산업혁명' 시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변화가 필수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노동개혁의 공통점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사간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라며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시장 유연성을 제고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일자리 창출 자체를 기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