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체제 출범으로 국내 산업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다. 트럼프 정부는 해외 기업의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강조했다. 미국 시장 비중이 높은 자동차의 경우 미국 정부의 방침을 거스를 수 없다. 현대·기아차가 갑자기 대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내놓는 이유다.
◇ 트럼프의 압박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내 자동차 빅3의 CEO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 내에 자동차 공장을 더 지으라고 강조했다. 만일 공장을 더 지을 경우 각종 규제 축소는 물론 세제혜택을 부여하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 자동차 기업들을 이처럼 압박하는 것은 일자리 창출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을 기치로 내걸었다. 미국 물건을 많이 구매하고 이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겠다는 생각이다. 강력한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중요하다. 자국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여야 해서다. 자동차 업체들을 압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은 고용 창출력이 높은 산업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행보에 대해 많은 국가, 많은 기업들, 특히 해외 기업들은 크게 우려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강해 무시할 수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추진력은 유명하다. 자칫 트럼트 정부의 눈 밖에 났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받을 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단 미국 내 자동차 기업들부터 기민하게 움직였다. 포드는 최근 멕시코에 16억 달러 규모의 공장을 건설키로 했던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대신 미시간 공장에 7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GM은 올해 미국 공장에 1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고 일자리 1000개를 창출, 유지하기로 했다. 크라이슬러는 중서부 공장 2곳에 10억 달러를 투자하고 새 일자리 2000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미국 기업들부터 길들여 놓은 이후 점차 압박 수위와 범위를 높혀갈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내 진출해 있는 해외 자동차 메이커들이다. 미국 업체들부터 다잡은 이후 해외 업체들을 압박할 명분을 쌓았다는 분석이다.
◇ 날아든 불똥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자동차 업체들에 대한 압박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우선 미국 시장 비중이 높은 도요타가 나섰다. 도요타는 최근 미국 인디애나 주 프린스턴 공장에 6억 달러를 투자하고 일자리를 400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도요타는 트럼프 대통령이 예의주시하던 업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 일자리가 멕시코로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많은 자동차 메이커들은 멕시코에 생산 기지를 두고 북미 시장을 공략한다. 미국보다 인건비가 저렴한데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등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업체들에게는 여러모로 이득이다.
▲ 도요타의 미국 켄터키 공장. |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선인 시절부터 다수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보유하고 있는 멕시코 공장에 대한 불만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 탓에 도요타는 물론 끝까지 버티던 GM도 멕시코 공장 투자 확대 계획을 접고 백기투항했다. 현재 버티고 있는 곳은 BMW, 폭스바겐 등 독일 업체들 뿐이다.
국내 기업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미국 시장은 국내 자동차 업체들, 특히 현대·기아차에게는 중국과 함께 매우 중요한 시장이다. 새로 바뀐 대통령이 자국 업체들부터 해외 업체들까지 압박하고 나오니 현대·기아차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현대·기아차는 최근 미국 투자 계획을 넌지시 흘렸다.
현대·기아차는 향후 5년간 미국에 31억 달러를 투자하고 미국에 신규 공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내놨다. 우리 돈으로 3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한 셈이다. 여기에 미국 공장 신설 카드도 덧붙였다. 다만 '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가능성만 열어뒀다. 향후 사태 추이를 보겠다는 계산이다.
◇ 고민에 빠진 기아차
현대·기아는 일단 여타 글로벌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급한 불을 껐다고 보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상황을 예의주시 해야겠지만 적어도 트럼프의 맹공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문제는 기아차 멕시코 공장이다. 기아차는 작년 멕시코 공장을 야심차게 가동했다. 하지만 트럼프라는 암초를 만나면서 시작부터 위기에 빠지게 됐다.
기아차가 멕시코 공장을 건설한 것은 북미와 남미를 아우르는 생산기지가 필요해서였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각각 미국 내에 한 곳씩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현대차의 경우 브라질에도 공장을 보유하고 있어 북미와 남미 지역 모두를 커버할 수 있었다. 반면 기아차는 그러지 못했다.
▲ 기아차 멕시코 공장. |
이에 따라 여러가지 조건이 좋은 멕시코에 생산 기지를 세워 북미 물량과 남미 물량을 커버할 예정이었다. 실제로 멕시코 공장 가동 이후 기아차의 생산성도 좋아졌다. 기아차는 멕시코 공장 생산 물량 80%를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 수출해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 주의, 특히 멕시코를 겨냥한 날선 으름장에 기아차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당초 기아차는 멕시코 공장의 생산능력을 연산 20만대에서 내년까지 40만대로 늘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미국 신규 투자를 발표하면서 이 계획은 보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차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를 지목하면서 내부적으로 걱정이 많았다"며 "현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룹 차원에서 대응 방안을 면밀히 살피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의 '바이 아메리칸' 정책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은 고용 규모가 큰 자동차 등의 산업 위주이지만 점점 범위를 넓힐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대외 무역기조인 보호 무역 주의와 맞물려 돌아가면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