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은 제2의 하이닉스 신화를 꿈꿨던 걸까. 중국 더블스타와 협상이 결렬되며 막다른 길에 이른 채권단에 홀연히 협상카드를 던지고 사라진 SK그룹 행보에 짙은 여운이 남고 있다.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는 최근 금호타이어 채권단인 산업은행에 인수 의사를 타진했다. 금호타이어가 유상증자를 실시하면 여기에 참여해 경영권을 가져가겠다는 게 골자다. 금호타이어의 골칫거리였던 중국 공장을 사겠다는 제안도 했다.
인수금액은 총 7000억원. 경영정상화에 성공하면 대박을 낼 수 있지만 반대라면 7000억원을 날릴 수 있는 모험이다. SK이노베이션과 SK케미칼이 전기차 배터리와 부품소재 사업을 하고 있지만 타이어 제조는 SK그룹으로서도 생소한 분야다.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보다는 신규 진출에 가깝다.
더구나 금호타이어는 2012년 이후 4년 연속 매출이 쪼그라들었다. 올해 들어선 이미 51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그럼에도 SK그룹이 타이어 사업을 염두에 둔 건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해 보란듯이 그룹의 캐시카우로 키워낸 자신감 때문으로 풀이된다.
당시에도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하고 시황마저 들쭉날쭉한 반도체 시장에서 SK그룹이 하이닉스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6년이 흐름 지금, SK하이닉스는 그룹 영업이익의 70%를 창출하는 핵심계열사로 성장했다.
SK그룹이 산업은행 등 금호타이어 채권단에 제안한 인수방식도 하이닉스를 사들일 때와 흡사하다. 당시 SK그룹은 하이닉스가 실시하는 유상증자에 참여해 신주(14.7%)를 취득하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확보했다. 채권단 입장을 감안해 구주(6.4%)도 취득했지만 구주 인수에 들어간 돈은 1조800억원에 불과했다. 신주 인수가액 2조3400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유상증자를 통한 신주인수는 당시만 해도 대기업에는 생소했던 인수합병(M&A) 방식이다.
당시 SK그룹이 꺼낸 명분은 신주 인수 방식이어야 회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구주 인수는 기존 주주들의 주머니로 돈이 들어가는데 비해 신주 인수는 회사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형태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기존 주주 입장에선 뜨악한 제안이었지만 SK그룹은 이를 관철했다.
이번 금호타이어 인수제안에서 신주 인수 방식을 채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더구나 금호타이어는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에서 핵심적인 관심사안이다. 기존 주주나 채권자의 입장을 먼저 살필 것인지, 회사 회생을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고 지역경제에 기여할 것인지 채권단에 선택지를 던진 게 SK그룹의 승부수인 셈이다.
다만 SK그룹으로서도 썩 내키지는 않은 카드였던 것으로 보인다. SK㈜는 조회공시 답변을 통해 "금호타이어 지분인수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SK 관계자는 "주주와 교감없는 인수합병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금호타이어 주가는 10% 넘게 올랐지만 SK㈜는 한때 1만6000원이나 떨어졌다. 주가 흐름만 보면 SK㈜는 인수 명분이 마땅찮은 상황이다.
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금호타이어를 맡긴다면 열의를 갖고 정상화에 힘을 쏟겠지만 구태여 주주들의 반발을 감내하면서까지 금호타이어를 인수할 필요가 있겠냐는 신호나 다름없다. 만약 SK㈜가 다시 인수전에 뛰어든다면 그를 뒷받침할 명분이 필요해진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금호타이어를 둘러싼 주변 여건은 녹록지 않다. 일부에선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높다며 차라리 청산하자는 의견도 적지 않다. SK그룹은 국가경제를 위해 인수하는 것이라며 그에 상응한 보상을 요구할 것이고, 채권단은 휴짓조각이 될지언정 책임소재를 따지는 문제에 휩싸이는 걸 달갑잖게 여길 가능성이 다분하다.
결국 선택은 경제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이다. 하이닉스 때는 구주 인수에 후한 점수를 주려던 유재한 당시 정책금융공사 사장이 물러나면서 매각의 물꼬가 트였다. 이번에 SK그룹은 금호타이어를 인수할 수 있다는 속내를 살짝 내비쳤고 채권단은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금호타이어가 누구 손에 맡겨지든 최종 매각까지는 쉽지 않은 수싸움이 뒤따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