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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앞을 내다봐야"…故최종현 SK회장의 경영자론

  • 2018.08.13(월) 18:20

앞선 준비로 에너지·이동통신 등 뿌리내려
1970년대 이미 '반도체 꿈' 품어…인재양성도

1997년 6월 미국에서 폐암 수술을 받은 고(故) 최종현 회장은 석달 뒤 귀국해 암담한 경제현실에 쓴소리를 냈다. 그는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금리인하와 규제완화 등을 촉구했다. 연초부터 한보·삼미·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빨간불이 들어왔지만 정부는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며 위기론을 불식하는데 급급하던 때다.

 

▲ 폐암 수술을 받은 故 최종현 회장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왼쪽 두번째)


그해 11월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폐암 수술 직후에도 석학들과 토론으로 한국경제의 앞날을 논했던 그는 IMF체제 돌입 이후 "우리가 잘못해서 경제가 이꼴이 됐다. 죄인 중의 죄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때의 무게감이 컸던 것일까. 전경련 회장으로 3연임을 했던 그는 이듬해 8월26일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영자는 10년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고 최 회장이 별세한지 올해로 20주기를 맞는다. 1973년 형인 최종건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뒤 25년간 SK그룹을 이끌어온 그는 창업주가 아님에도 창업주와 진배없는 대우를 받았다. 직물회사로 출발한 SK에 에너지와 이동통신이라는 날개를 단 인물이 고 최 회장이다.

그는 중동지역 왕실과 석유 네트워크을 쌓는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1983년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외유전 개발에 뛰어들어 이듬해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하는 신화를 쓴다. 1991년에는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고 최 회장은 그룹 총수의 역할을 미래설계에서 찾았다.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워 새로운 먹거리 물색에 나선지 10년 뒤인 1994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 그에 앞서 사업권 자진반납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며 절치부심한 끝에 사업기회를 거머쥐었다.

1970년대 후반 일찌감치 반도체의 가치를 알아본 것도 고 최 회장이었다. 그는 1978년 '선경반도체'를 설립했으나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었다. 그로부터 30여년 뒤인 2011년 그의 아들인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을 실현했다"며 아버지를 회상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그룹 전체 영업이익의 80%를 창출하는 '캐시카우'로 자리잡았다.

고 최 회장을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게 인재 욕심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가 안되던 1974년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당시 서울 집 한 채 값보다 비싼 해외 유학비용과 생활비를 인재들을 위해 썼다. 44년간 지원한 장학생만 3700명. 이 가운데는 동양계 최초 예일대 학장인 천명우(심리학과), 한국인 최초 하버드대 종신교수 박홍근(화학과) 등 세계적 석학이 포함돼있다.

이항수 SK그룹 홍보팀장(전무)은 "고 최 회장의 혜안과 통찰 그리고 실천력은 후대 기업인이 본받아야 할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면서 "그의 경영철학을 올곧게 추구해 사회와 행복을 나누는, 존경받는 일등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SK그룹은 고 최 회장 타계 20주기를 맞아 오는 24일 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그의 경영철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SK그룹 임직원들은 기부금을 모아 고 최 회장의 뜻을 기리는 5만평 규모의 숲을 조성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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