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엠(GM)에 다시 암운이 드리웠습니다. 철수설로 홍역을 앓은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한국GM이 연구개발(R&D) 법인을 따로 분리하겠다는 데서 회사와 노동조합, 한국GM 최대주주인 미국 GM 본사와 2대주주 산업은행의 대립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회사는 한국GM이 가진 신차개발 역량을 본사 차원에서 키워 세계 무대에서 활용하려는 게 분리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한국GM 노동조합이나 산업은행은 GM 본사가 결국 한국GM을 버리려는 속내가 담겼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손을 맞잡은 지 5개월 만에 다시 신뢰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난 4일 한국GM이 이사회에서 결정한 연구개발법인 분할 방안은 이렇습니다. 기존 한국GM에서 자동차 및 부품 연구개발 사업을 인적분할해 자본금 3911만원의 신설법인 '지엠테크니컬센터코리아'를 세우는 것입니다. 분할후 존속법인 한국GM의 자본금은 2168억원, 분할비율은 0.018%입니다.
이렇게 나눠 기존 한국GM과 GM테크니컬센터코리아가 각각의 사업에 집중토록 한다는 겁니다. 이 방안은 오는 19일 열릴 한국GM 임시주주총회를 통과하면 그대로 확정됩니다.
발단은 지난 7월20일 한국GM의 투자계획 발표에 있었습니다. 한국GM은 부평공장의 글로벌 소형 SUV 생산을 확대를 위해 총 5000만달러를 새로 투자하고 연 7만5000대까지 내수 및 수출 물량을 추가 생산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한국GM 직원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은 게 있었습니다. 한국GM이 연말까지 글로벌 제품개발 업무를 집중 전담할 신설법인을 마련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본사가 한국GM이 가진 R&D 역량을 높이 사 전략적으로 키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부평공장 방문해 있던 배리 엥글 해외사업부문(GM International) 사장은 "한국GM이 GM의 글로벌 베스트셀링 모델인 콤팩트 SUV 차세대 디자인 및 차량 개발거점으로 지정됐다"면서 "100명의 엔지니어를 채용해 한국GM의 전체 연구개발 인력을 3000명 이상으로 확충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노조(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지부)는 즉각 반발했습니다. 한국GM 본체에서 연구개발 기능을 따로 떼어낸다는 얘기였기 때문입니다. 나흘 뒤인 같은 달 24일 노조는 '법인 분리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법인 분리 계획에는 향후 철수나 매각이 수월하게 하는 GM 본사의 '저의'가 담겨있다는 게 반대의 핵심입니다.
노조는 연구개발 조직 분리와 전담 법인 신설이 노조원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중요한 사항인 만큼 노조와 협의를 거칠 사안이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분리에는 디자인센터·기술연구소·파워트레인·생산기술 일부 등이 포함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GM 본사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는 알짜배기들입니다.
노조는 2대 주주(지분율 17%) 산업은행에도 손을 벌렸습니다. 법인 분리 안건이 주주총회에 올라올 경우 2대 주주로서 비토권(거부권)을 행사해 달라는 겁니다.
산업은행도 GM 본사가 올 초 군산공장 폐쇄 때처럼 또다시 '깜깜이 경영'을 시작했다며 불만이 가득한 상황입니다. 산업은행은 주주총회 개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둔 상태고, 납득할 근거 없이 주총이 강행된다면 비토권 행사, 소송 등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이동걸 회장이 기자간담회, 국회 국정감사 등의 자리에서 여러 차례 밝혀왔습니다.
산업은행은 분리 반대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습니다. 다만 고용 문제가 달린 노조나, 산업은행을 통해 지원자금을 투입한 한국 정부 등 이해당사자들에게 최소한의 설명조차 한국GM이 하지 않고 있다는 데 불만이 큽니다. GM 본사의 일방적인 분리 추진이 이해관계자 간 신뢰를 깨는 행위라는 겁니다.
한국GM이 공개한 분할방안에도 분할 실행에 필요한 회계나 법률적 내용만 제시돼 있을 뿐, 산업은행이 2대주주로서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 없어 '이런 일방 통행은 곤란하다'는 입장입니다. 주주총회에서 동의를 구하려면 적어도 구체적인 타당성 검토 결과나 기대 효과, 노조와의 협의 결과 같은 판단 근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한국GM은 글로벌 콤팩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하는 역할을 한국에서 수행토록 한 만큼 법인 분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투자나 의사결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려면 본사와 더욱 유기적으로 움직일 독립 법인이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GM은 현재 미국 디트로이트와 중국 상하이(上海)에 테크니컬센터를 두고 있습니다.
| ▲ 지난 4월23일 (왼쪽부터)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 배리 엥글 GM 총괄 부사장,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문승 한국GM 협력업체 대표가 임단협 잠정합의안을 들고 부평공장 기자회견장에서 손을 잡고 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하지만 노조 측은 생산 판매기능만 남게 되는 기존 한국GM이 단순 판매 수출 공장으로 전락할 걸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향후 생산분야 구조조정이 지금보다 쉽게 이뤄지고, 협약이 끝나 GM이 발을 뺄지도 모를 10년 뒤에도 독자 생존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걱정입니다. 법인 분리로 노조도 갈라질 수 있어 회사와의 협상력도 줄어드는 것도 반발의 배경입니다.
한국GM 노조는 지난 15~16일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쟁의행위 찬반 투표에서 78.2%의 찬성을 확보했습니다. 지난 12일께 중앙노동위원회에 신청한 쟁의 조정신청에서 조정중지 결정이 나면 합법적 파업을 할 수 있는 쟁의권이 주어집니다. 오는 22일께 중노위 결정이 나오면 파업도 가능한 상황이란 얘깁니다. 산업은행이 인천지방법원에 낸 주주총회 개최금지 가처분 신청 결과 역시 주총 예정일을 앞둔 금명간 나올 전망입니다.
중노위나 가처분 신청이 어찌 되든 또다시 혼란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한국GM이 또다시 짙은 안갯속으로 차를 몰아가는 모습에 불안한 마음이 거둬지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