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 비트코인의 작동 원리를 담은 논문에 첫 등장해 더이상 낯설지만은 않은 블록체인 기술. 현존하는 어떤 기술보다 사업의 편리성, 투명성을 보장한다는 이유에서 전 세계 모든 산업에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특히 해운업을 파고드는 속도는 매우 빠르다. 수십만개의 컨테이너와 선박 관리에 있어 여전히 종이 문서에 의존하는 선사들이 좀 더 편리한 방식을 갈구한 결과다.
업계 안팎에선 벌써부터 블록체인 플랫폼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세계 1위 머스크라인은 IBM과 글로벌 무역 블록체인 플랫폼 ‘트레이드렌즈’를 설립했고, 프랑스 CMA·CGM과 중국 COSCO 등은 이에 대응하는 '글로벌 쉬핑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국내에선 현대상선이 선봉에 서 있다. 현대상선은 삼성SDS등 국내 굴지의 IT업체들과 손잡고 이미 블록체인 도입 검증 작업을 끝내놨다.
최근에는 국내 선사 중 유일하게 글로벌 선사들과 블록체인 데이터 표준화 작업에 참여, 블록체인으로 항만 물류의 혁신을 이끌 준비를 마쳤다.
◇ 개념증명 통해 블록체인 적용 효과 확인
블록체인 시대를 맞는 현대상선의 태도는 적극적이다. 이미 지난 2017년 5월 해양수산부, 삼성SDS 등 38개의 민·관·연으로 구성된 '해운물류 블록체인 컨소시엄'에 참여, 7개월만에 도입 검증 작업을 마무리했다.
당시 현대상선은 컨소시엄을 통해 먼저 부산~칭다오 구간의 냉동 컨테이너 화물, 부산~베트남·인도·유럽 구간의 일반 컨테이너 화물에 대해 2차례의 시범 운항을 진행했다.
선적 예약부터 화물 인도까지 물류 과정 전반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보자는 취지로, 1차에서는 블록체인 기반의 가상의 선사 사이트에 입력한 정보가 터미널과 화주에게 전달되는지를 확인했다.
2차에선 금융기관이 가상의 선사가 보내주는 선하증권(B/L)을 확인하는 과정을 추가해 블록체인으로 무역금융거래가 가능한지 따져봤다.
또 사물인터넷(loT) 장비가 부착된 냉동 컨테이너의 정보를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등 loT 기술과 블록체인 기술과의 연계 작업도 시도했다.
두번의 개념증명(POC,Proof of Concept)을 거치면서 현대상선은 블록체인 기술이 지닌 신속성과 투명성 등을 확인했다.
◇ 시간·비용 절감, 투명성 확보…'脫 물류대란' 기대
현대상선의 발빠른 대응은 블록체인 시대가 해운업계의 가장 큰 고민인 데이터 장벽을 허물어줄 것이란 기대에서 비롯됐다.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의 해상 운송에 블록체인 기술이 접목되면 모든 행정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시간과 비용의 절감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IBM이 케냐 나이로비와 네덜란드 로테르담간 컨테이너 화물운송의 실제 사례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상품이 해상으로 운송되기까지 무려 30개 관련 기관의 승인이 필요하고 200종의 서류 작업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은 종이 문서로 처리된다.
운송과정에 요구되는 선적요청서, 상업송장, 선하증권등 모든 서류가 종이로 전달되는 것이다. 여기에 수출입 신고, 통관 등으로 만나는 대상이 늘어나면 교환해야 할 종이 문서도 그만큼 늘어나는 구조다.
그러나 블록체인 기술이 도입되면 문서가 전자화 되면서 소요시간 단축을 기대할 수 있다. 아울러 '블록(Block)'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술 특성상 수많은 문서 교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 실수, 위변조 가능성에서도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소요 시간이 줄고 오류가 사라지면서 비용 절감 효과도 기대된다. IBM은 글로벌 선사들이 운항하는 동안 무역문서 처리 및 관리에 드는 비용이 전체 운송비용의 15~20%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블록체인 기술이 상용화 될 경우 이론적으로 연간 270억 달러의 행정 비용이 절감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될 경우 글로벌 무역 모델이 개선되면서 세계 GDP가 4.7%(약 2.6조 달러) 증가하고, 세계무역이 14.5%(약 1.6조 달러)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관세장벽 제거 효과(세계 GDP의 0.7%, 세계 무역의 10.1% 증가)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투명성 확보도 예상된다. 해운업계는 지난 2017년 한진해운 파산 당시 수출입 화물을 실은 한진해운의 선박을 찾지 못해 극심한 물류 대란을 겪었다. 당시 화주들은 자신들의 물건이 담긴 컨테이너를 찾지 못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이는 국내 해운업계로 불똥이 튀어 현대상선 등 국내 선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블록체인이 도입되면 선사·운송사·터미널간의 물류 전 과정, 선사 위치 등 가시성이 확보되면서 '제2의 물류 대란'에선 벗어날 수 있다는 게 현대상선의 설명이다.
◇ 실제 모델 개발 속도...표준화·법제화 시급
현대상선은 최근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실제 모델을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그동안은 개념증명 테스트가 블록체인의 해운 물류 전반의 활용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면 올해는 구체적인 업무를 대상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 실제 모델 개발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블록체인 모델이 당장 상용화되기까지에는 아직 한계가 많다.
우선 선주, 화주, 터미널 등 운항 과정에서 만나야 하는 수많은 이해 관계자들과의 의견 일치가 시급하다. 블록체인 적용 여부, 데이터 입력 및 공유 방식 등에 대한 표준화 작업이 전제돼야 한다.
예컨대 이해 관계자중 한쪽에서라도 블록체인 적용을 거부하거나 데이터 공유 방식에 이견이 있을 경우 블록체인 기술은 있으나마나하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선사들이 직접 표준화 작업에 나서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세계적인 선사인 머스크, 하팍로이드, ONE(Ocean Network Express), MCS 등 4개사는 지난 4월말 미 연방해사국(FMC)에 등록을 마치고 '디지털 컨테이너 해운 협회(DCSA, Digital Container Shiping Asociation)'를 공식 출범시켰다.
DCSA는 산업의 디지털화 추세에 발맞춰 해운업계 데이터 표준화 추진을 목적으로 탄생했다. 창립멤버인 4개사 이외에도 현대상선 등 글로벌 선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도 요구된다. 블록체인 시대를 맞는 정부의 대응 속도는 민간 기업에 비해 더디다. 관세청이나 해양수산부 등 일부 정부 부처 위주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민간 기업들의 기술력을 받쳐주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현대상선은 우선 정부의 법제화 움직임에 앞서 꾸준한 개발을 통해 블록체인 기술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에만 두번에 걸쳐 IT부문의 경력직을 대거 채용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현재까지 블록체인 기술의 성숙도·완성도 및 주변 여건을 고려하면 당장 전면적인 도입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대상 범위를 한정해서라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 그 효과를 입증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