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년 동안 급격한 실적 악화를 겪은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앞이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여파로 더욱 어두워지고 있다. 국내 석화업체들의 사업이 최대 수출대상국인 중국의 수급환경 변화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다. 미국과 중국간 무역분쟁이 올초 1단계 합의를 이루며 중국 경기개선 기대를 품었지만 코로나19가 대륙을 강타하면서 이마저도 접게 됐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국내에서 생산된 석유화학제품은 약 40%가 해외로 수출되고, 이 가운데 절반이 중국으로 간다. 대표적인 방향족 중간원료 제품인 PX(파라자일렌)의 경우 작년 기준 전체 수출 물량중 80%가 중국으로 향할 정도다. 코로나로 대륙의 경기가 둔화하면 국내 석화업체의 실적이 '더블 딥(이중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 은근히 '반사익' 기대할 수도 있지만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는 타격이 크지 않았다. 당시 주요 제품 스프레드(원료와의 가격차이)가 높은 변동성을 보였지만 사스 발발 이후 석화제품 평균 스프레드는 그 이전인 2002년보다 커졌다. 국내 업체 석화제품의 중국 수출도 2003년 5월 이후 세계시장의 석유화학시장 수요 회복세에 힘입어 전년보다 늘었다.
최근 상황도 오히려 국내 석화업계에 반사이익을 줄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국내 석화업체와 경쟁관계에 있는 중국 내 주요 동종업체들이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 그 만큼 국내 업체에 판로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현지 석화업계는 당장 코로나로 인해 가동에 큰 차질을 빚지는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코로나 발원지인 후난(湖南)성 우한(武漢)에 있는 SK종합화학 합자법인(시노펙 지분 65%) 역시 현지 인력을 중심으로 정상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주요 석유화학단지의 약 60%도 코로나 영향이 크지 않은 대륙 동남부 연안에 위치해 아직 큰 생산 차질은 빚지 않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최근 하향 조정되고 있는 대륙의 설비 가동률을 더 떨어뜨릴 수는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올해 상반기 현지 업계의 공급 조절과 주요 업체의 대규모 설비 보수 예정으로 중국내 공급물량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신용평가는 "작년 4분기 이후 일부 업체들이 설비 가동률을 하향 조정한 데 이어 이달 들어 중국 시노펙, 페트로차이나도 일부 지역 공장 가동률을 80% 수준으로 하향했다"며 "또 상반기 글로벌 화학사의 정기보수가 집중되고,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석화설비 증설 일정이 지연될 경우 국내 업체에는 일부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 사태 길어지면 '판로 봉쇄' 우려 커
반면 코로나 여파로 중국의 화학제품 수요 자체가 위축되는 것은 국내 석화업계에 큰 위협이다. 중국내 석화제품 구매업체들이 가동 차질을 빚거나 물류가 막히면 판매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업계는 중국 주요 석유화학업체의 폴리올레핀(Polyolefin) 재고가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인 춘지에(春節, 설) 연휴 이전 대비 2배 수준으로 증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일부 항구가 폐쇄되면서 수출입 물류에도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는 상황도 전해진다.
업계 한 관계자는 "코로나로 특수를 맞고 있는 마스크의 원재료 중 하나인 폴리프로필렌(PP) 부직포 등 위생용품, 포장재 관련 수요는 확대 가능성이 있지만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석유화학제품 전반적인 수요 감소로 인한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KB증권에 따르면 따르면 석화업체 수익성의 가늠자가 되는 나프타-에틸렌 스프레드(가격 차이)는 지난 27일 국제시세 기준 톤당 253.5달러다. 나프타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는 가운데(27일 톤당 436.5달러) 에틸렌 가격은 정체(21일 이후 톤당 700달러)되면서 연초 200달러를 밑돌던 스프레드는 다소 확대됐다. 하지만 사태가 지속될 경우 스프레드가 다시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석화업계에서는 흑자를 낼 수 있는 나프타-에틸렌 스프레드 마지노선을 250달러 선으로 본다.
작년 한 해 LG화학·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옛 한화케미칼) 등 국내 주요 4개 석화업체의 영업이익은 2조8503억원으로 전년보다 38.1% 감소했다. 매출은 전년보다 8.4% 감소한 35조7413억원이었다. 한신평은 "중국의 경제력이나 세계 석유화학시장 내 위상은 사스 때와는 비교할 수 없다"며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할 수록 국내 석화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커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