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 투자를 해놔야 경기가 좋아졌을 때 본 실력이 나온다" 지난해 설비투자 계획을 발표한 화학 업계 관계자가 전한 말이다. 업계 시황이 안좋더라도, 경기가 되살아나는 시점에 맞춰 물량을 내보낼 마중물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미국과 중국 사이 무역전쟁, 글로벌 공급과잉으로 2018년 말을 기점으로 화학 시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하지만 미래 경기 회복을 점치고 국내 뿐만이 아닌 해외기업들도 지난해 설비투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이 돌변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글로벌 수요는 물론 공급망 모두를 집어삼켰다. 화학사들은 당장의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2019년말 미국과 중국간 무역전쟁 1단계 합의로 점진적 경기회복을 점쳤던 화학사들이 투자계획을 조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 글로벌 화학사 줄줄이 '감액'
전세계 화학사들은 올해 투자계획을 재조정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경기가 침체될 기미가 보이면서 허리띠 조이기에 나선 상황이다.
세계 최대 정유사 사우디 국영 아람코가 먼저 신호탄을 쐈다. 아람코는 2달전 올해 설비투자액을 250억달러(약 30조8000억원)에서 300억달러(약 37조원) 사이에서 집행하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올해 투자 예정액 351억달러보다 많게는 29% 삭감된 금액이다.
아람코는 대규모 설비투자를 통해 화학사로 외형을 넓히고 있다. 단순히 기름을 파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를 부산물로 플라스틱 원료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하는 계획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이 계획에 일부 제동이 걸렸다.
다른 화학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싱가포르 쉘(Shell), 프랑스 토탈(Total), 영국 툴로우(Tuloow) 등 각국 주요 업체들은 당초 목표액이나 지난해 투자액보다 적게는 20% 이상 설비투자액을 축소할 방침이다. 대다수가 지난해보다 올해 설비투자액을 늘릴 계획이었던 만큼 전염병이란 예상치 못한 복병에 발목이 잡혔다.
코로나19로 원재료 원유값이 급락한 호재가 더 큰 폭의 수요 감소로 상쇄됐다. 화학사들의 주수입원인 에틸렌 마진은 지난해 톤당 565달러를 고점으로 하락세를 이어가 이달 첫째주 기준 207달러로 절반 이상 빠졌다. 코로나19가 주요국 북미, 유럽 등에 본격 확산된 3월이 지난 4월부터 300달러대가 무너졌다.
에틸렌은 여러 화학제품 원료로 두루 쓰여 '화학 산업의 쌀'로 불리며, 화학사 업황을 가늠하는 기준점으로 쓰인다.
국내 화학사들도 코로나19 여파로 설비투자를 축소해 유동성 확보에 나서는 분위기다. 올해 1분기 LG화학·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 주요 4개사 총영업이익(연결 기준)은 4426억원으로 지난해 1분기 8207억원보다 46.1% 줄었다. 국내 화학사들의 에틸렌 손익분기점은 이 제품 톤당 마진이 250달러~300달러를 웃돌아야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국내사도 '재조정'
LG화학은 설비투자액을 축소할 것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지난달 28일 열린 실적 설명회에서 설비투자 목표액을 당초 6조원에서 5조원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전지 부문은 예정대로 투자할 것으로 언급한 것에 비춰 화학 부문 투자액 축소가 불가피하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8일 코로나19 확산 추이에 따라 목표 설비투자액을 1조5000억원에서 10~20% 가량 삭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유사도 투자액 축소를 저울질하고 있다. 정유사들은 최근 대규모 설비투자로 화학 부문 비중이 커졌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와 유사한 3조원 후반에서 4조원 내외 설비투자를 계획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투자 축소를 검토 중이다. S-OIL은 7조원을 투자할 석유화학 2단계 프로젝트를 내년 초나 하반기쯤 재무구조가 얼마나 개선될지를 보고 결정할 방침이다.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는 집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감액이나 일정 지연없이 그대로 진행한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화학은 장치 산업인 만큼 투자를 늦추면 도태된다"며 "신사업 위주로는 일단 투자를 집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석유화학협회 관계자는 "굵직한 조단위 투자는 업계가 예정대로 집행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 조달비용, 공사 업체와 이해관계가 있어 일정을 늦추기 어렵다"며 "결국 설비 증설 등 규모가 작은 사업 위주로 감액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기간이 6개월 안팎으로 짧게 필요해 시황이 좋아졌을 때 빠르게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