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家)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 중 2조원 이상의 현금과 미술품 등을 사회의 몫으로 돌리기로 했다. 공적인 의료 지원에 1조원을 기부하는 동시에 주로 국가가 운영하는 박물관과 미술관 등에 감정가 최소 1조원을 넘는 미술품을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유족들은 12조원 이상의 상속세를 낼 계획도 밝혔다. 기부와 기증, 납세 규모는 모두 합쳐 14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이 회장이 남긴 유산 전체의 60%가량 되는 규모라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특히 이중 어린이 환자들에 대한 3000억원의 지원은 비용문제로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저소득층 환아들에게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 의료 공헌에 1조원 '통 큰 기부'
삼성전자는 28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이같은 내용의 의료 공헌과 미술품 기증, 상속세 납부 계획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삼성 측은 "이는 국가경제 기여, 인간 존중, 기부문화 확산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한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취지"라며 "유족들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다양한 사회환원 활동을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회장은 생전에 평소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할 것이다.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업의 사명이며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의무"라고 강조해 왔다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유족들은 먼저 공공 성격의 의료 지원에 1조원을 내놨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이슈가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해 감염병 대응 인프라 구축에 이 중 7000억원을 기부키로 했다.
이 가운데 5000억원은 한국 최초의 감염병 전문병원인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건립에 사용될 예정이다. 이 병원은 일반·중환자·고도 음압병상, 음압수술실, 생물안전 검사실 등 첨단 설비를 갖춘 150병상 규모의 세계적 수준 병원으로 계획됐다. 2000억원은 질병관리청 산하 국립감염병연구소의 연구소 건립과 필요 설비 구축, 감염병 백신 및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 지원 등 감염병 대응을 위한 인프라 확충에 사용될 예정이다.
7000억원의 기부금은 국립중앙의료원에 출연된 후 관련 기관 협의를 거쳐 전문병원과 연구소의 건립과 운영 등에 활용할 계획이다.
또 유족들은 소아암·희귀질환에 걸렸지만 비싼 치료비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3000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백혈병·림프종 등 13종 소아암 환아 지원에 1500억원, 크론병 등 14종류의 희귀질환 환아들을 위해 600억원, 소아암 및 희귀질환 임상연구와 치료제 연구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 900억원 등이다.
삼성이 의료공헌에 어린이 환자 지원을 포함시킨 배경에는 유족들의 의지가 크게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 이건희 회장 와병 중 삼성서울병원을 오가던 유족들이 어린 환아들이 비용 문제로 적시에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접하고 이에 대한 지원 필요성을 느꼈다는 전언이다.
삼성 관계자는 "어린이 환자들은 적시에 필요한 치료를 받으면 성인에 비해 완치될 확률이 높지만 비용문제로 치료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안다"며 "소아암, 희귀질환 어린이들 가운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아를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와 치료, 항암 치료, 희귀질환 신약 치료 등을 위한 비용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은 향후 10년 동안 소아암 환아 1만2000여명, 희귀질환 환아 5000여명 등 총 1만7000여명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족들은 서울대어린이병원을 주관기관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어린이 환자 지원 사업을 운영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서울대와 외부 의료진이 고루 참여한다. 전국 어린이 환자들이 각 지역에 위치한 병원에서 편하게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전국 어린이병원의 사업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라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 미술품 2만3000여점도 "삼성 품 떠난다"
아울러 유족들은 국보 등 지정문화재가 다수 포함된 이 회장 소유 고미술품과 세계적 서양화 작품, 국내 유명작가 근대미술 작품 등 총 1만1000여건, 2만3000여점을 국립기관 등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는 감정가가 최소 1조원을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술계에서는 이 회장 소유 미술품 전체의 감정가가 총 2조5000억~3조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문화재급 유물과 고서, 고지도 등 개인 소장 고미술품 2만1600여점은 국립박물관에 기증된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 등 지정문화재 60건(국보 14건, 보물 46건)이 여기에 포함된다.
근대 미술품 1600여점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각 작가 및 지자체 미술관 등에 기증된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장욱진의 '소녀' '나룻배' 등 한국 근대미술 대표작가들의 작품은 각 작가 및 지자체 미술관으로 넘어간다.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및 샤갈, 피카소, 르누아르, 고갱, 피사로 등의 서양 화가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될 예정이다.
삼성 측은 "지정문화재 등이 이번처럼 대규모로 국가에 기증되는 것은 전례가 없다"며 "국내 문화자산 보존은 물론 국민의 문화 향유권 제고와 미술사 연구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 상속세 12조원 이상…유산 분배는 미공개
한편 유족들은 이 회장이 남긴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계열사 지분과 부동산 등 전체 유산의 절반이 넘는 12조원 이상을 상속세로 납부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삼성 측은 "이는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역대 최대 수준의 상속세 납부액"이라며 "지난해 우리 정부의 상속세 세입 규모의 3~4배 수준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삼성 관계자는 "상속세와 기부, 기증 규모를 합치면 전체 유산의 60% 가량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다만 유족들에 어떤 비율로 유산이 분배됐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수감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은 연부연납 제도를 통해 올해 4월부터 5년간 6차례에 걸쳐 상속세를 분납할 계획이다. 유족들은 "세금 납부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고 삼성 측은 전했다.
아울러 유족들은 생전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노력'을 거듭 강조한 이 회장의 뜻에 따라 다양한 사회환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측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관계사들이 기존에 진행하고 있는 사업 외에도 다양한 사회공헌 방안을 추진해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창업이념을 실천하고, '새로운 삼성'으로 거듭난다는 계획"이라며 "이번 상속세 납부와 사회환원 계획은 갑자기 결정된 게 아니라 그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