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대표이사와 등기이사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용단을 내렸다. 연초부터 '조카의 난'으로 불리는 경영권 분쟁을 겪었으나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1분기에 사상최대 실적을 작성한 시점에 내린 결심이다. 회사 경영이 안정적 상황을 넘어 성장가도에 진입한 만큼 전문 경영인에게 살림을 맡길 적기라고 판단하고, 자신은 금호석화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큰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1948년생인 그는 올해 74세다.
◇ 영업·재무·R&D 분야 전문 경영인이 '삼각축'
금호석화는 4일 이사회를 열어 전문경영인 체제로 지배구조를 전환하고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사회는 박찬구 대표이사와 신우성 사내이사의 사임의사를 받아들이고, 사내이사 2인을 추가로 선임하기로 했다. 교체되는 사내이사는 연구·개발(R&D) 부문의 전문가 고영훈 중앙연구소장(부사장)과 재무·회계 부문 전문가 고영도 관리본부장(전무)이다.
이로써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영업 부문 전문가 백종훈 대표이사와 함께 영업·재무·R&D 등 3개 부문의 전문가들이 전문경영진으로서 이사회의 한 축을 각각 담당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회사 관계자는 "선제적 투자 결정과 재무적 안정성을 중시한 경영으로 올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뒀다"며 "회사의 경영 기반이 견고해졌다고 판단한 박찬구 회장은 스스로 등기이사와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남으로써 각 부문의 전문경영인들을 이사회에 진출시켜 경영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 줘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예고된 변화…향후 행보에 주목
박찬구 회장의 이 같은 결정은 예고된 면도 있다. 지난 1월 말 박 회장의 조카인 박철완 전 상무가 박 회장의 경영권에 도전하는 공시를 내고, 양측이 3월 주총에서 표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금호석화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화한다고 밝힌 바 있어서다.
이번 결정은 결과적으로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하는 지배구조 선진화를 이룬 셈이기도 하다. 금호석화가 올해 주총에서 상정한 안건 중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안건만 부결된 바 있다.
아울러 분쟁 당시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의 의견이 엇갈린 가운데 사실상 '캐스팅보터'였던 국민연금이 박 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이 회사의 승리에 결정적이었던 점도 이번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국민연금은 2016년과 2019년에 박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기업가치 훼손 이력과 과도한 겸임' 등을 이유로 반대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박 상무가 표대결 패배 이후에도 "이제 시작"이라며 장기전을 예고한 만큼 앞으로도 국민연금의 우호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은 지난달 5일 금호석화 보통주 4만주가량을 팔아 지분율이 기존 8.15%에서 8.02%로 낮췄으나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박 회장은 사내이사에서 빠지면서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에서도 물러나지만, 미등기임원으로 회장직은 유지한다. 후계 구도 역시 현재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박 회장의 아들 박준경 전무와 딸 박주형 상무는 각자 역량을 쌓고 있으나 각각 78년, 80년생으로 그룹 경영을 맡기엔 젊다는 분석이다. 또한 앞선 경영권 분쟁을 고려할 때 박 회장의 자녀들도 경험을 쌓고 검증을 거쳐야 주주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박 회장의 향후 계획은 현재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파악되진 않는다. 다만 박 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나되, 그룹의 큰그림을 그리는 역할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회사 고위 관계자는 "지난 경영권 분쟁과 주총 표대결, ESG 경영 강화 흐름 등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박 회장의 구체적 역할은 추후에 윤곽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금호석화는 이번 신규 사내이사 선임을 위한 임시 주총을 내달 15일 열고 관련 안건에 대한 주주들의 승인을 받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