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바이오업계에서 소액주주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딘 신약 개발, 불성실공시 등이 원인이다.
'모래알' 소액주주 '똘똘' 뭉친다
17일 바이오업계에 따르면 헬릭스미스, 아이큐어, 휴마시스 등 바이오 기업의 소액주주들이 집단행동에 나섰다. 1세대 바이오기업 헬릭스미스는 최근 소액주주연합 소속 변모 씨 외 28명이 제기한 주주명부열람 및 등사 가처분 소송에서 일부 패소했다고 공시했다. 이에 따라 헬릭스미스는 변모 씨 외 28명에게 주주명부를 열람·등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번 소송은 소액주주연합이 주주명부를 확인해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앞서 헬릭스미스는 지난해 말 350억원 규모의 제3자 배정 방식의 유상증자를 통해 카나리아바이오엠에 경영권을 넘긴 바 있다. 소액주주연합은 오는 31일 예정된 임시주주총회에서 카나리아바이오엠 측 이사 선임을 막는 게 목표다.
헬릭스미스는 소액주주와 갈등을 빚고 있는 대표 기업으로 꼽힌다. 지난 2019년 유전자 치료제 '엔젠시스' 임상3상에 실패한 이후 소액주주와 경영권 분쟁을 겪어왔다. 이듬해는 주주 투자금을 고위험 사모펀드에 투자해 손실을 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업계에선 오는 주총에서도 회사와 소액주주연합간 표 대결이 이어질 것으로 관측한다. 헬릭스미스 소액주주연합은 2021년 임시주총에서 사내이사 2명을 소액주주 측 추천 인사로 교체하는 데 성공한 경험이 있다.
아이큐어 소액주주연합도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회계장부 열람 및 등사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회사 측의 무리한 전환사채(CB) 발행과 유상증자로 주가가 하락했다며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고 있다. 아이큐어는 패치 형태의 치매 치료제 개발 기업이다. 회사가 치매 치료제 임상 및 공장 증설 등을 목적으로 조달한 자금을 계열사 지분 확보 등에 주로 활용했다는 게 소액주주연합 측의 주장이다.
신약 개발 기업 오스코텍 역시 주주 3명으로부터 장부 열람 가처분 소송에 피소됐다. 이들 주주는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우호지분을 확보하고 경영 합리화를 위한 주주제안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진단기기 개발 기업 휴마시스, 유전자 진단 기업 파나진 등도 소액주주와 분쟁 중이다. 두 기업의 소액주주 모임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경영진 교체를 추진하고 있다.
"늑장 공시로 피해"…'뿔난' 소액주주
바이오업계에선 소액주주의 집단행동이 활발해지는 이유를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찾는다. 바이오산업은 개인 투자자의 정보 접근성이 유독 낮은 영역이다. 공시 내용조차 난해한 전문 용어로 가득한 데다 수익구조가 뚜렷하지 않은 업종 특성상 매출이나 영업이익으로 기업의 가치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투자의 중요한 판단 근거인 통계치나 기술이전 계약 관련 내용도 학회 엠바고나 영업기밀을 내세워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에 바이오 기업의 허위 공시나 늑장 공시로 인한 소액주주 피해 사례가 증가하면서 주주의 불만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바이오 업종은 임상 등 정보 공개에 따라 주가 변동성이 큰데, 바이오 기업의 임직원이 미공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뒤 주식을 팔아 이익을 보는 행태가 자주 적발된다. 지난 2020년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제약바이오 기업을 대상으로 한 포괄공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지난해 개선안을 내놨지만, 임상 중단 내용을 즉시 공시하지 않거나 공시에 자의적 판단을 포함하는 등 바이오 기업의 공시 위반 사례는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소액주주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기업의 경영 활동을 감시하고 장기적으로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특히 세계적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흐름에 맞춰 소액주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공격적인 소액주주 집단행동은 기업가치는 물론 바이오산업의 발전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신약 개발은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제약사(빅파마)도 10년 이상이 필요하다. 또 대부분 바이오 기업은 신약 개발을 위한 자금을 외부에서 수혈하는 만큼 대주주나 설립자의 지분구조가 취약한 편이다. 단기 성과만 보고 경영진 교체 등을 시도하는 행위가 오히려 기업의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소액주주의 집단화 움직임은 주주권리를 보호하고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면서도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바이오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주가 부양책을 내놓으라 하거나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산업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