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가 투자자 보호 강화를 목적으로 상장폐지 허들 낮추기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부터 제시해온 공약이며 현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다.
단순히 재무적 수치에만 중점을 두지 않고 종합적인 경영 상황을 살펴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 개선방안의 골자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실적이 기준에 미달하는 기업도 곧바로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고 거래소의 종합 심사를 받을 수 있다. 내년 3월 결산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각이다. 기업에 회생 기회를 주는 동시에 투자자 보호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일각에선 좀비기업들의 시장 퇴출을 막아 시장건전성을 훼손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상폐 제도 또 손보는 한국거래소
최근 한국거래소는 지난달 30일 열린 제3차 금융규제혁신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상장폐지 요건과 절차 정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상장폐지 제도 정비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공약집에 언급된 데 이어 정부 출범 후 110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기업 회생 가능성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상장폐지를 결정하고, 또 상장폐지를 단계적으로 추진해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거래소 방안중 하나는 재무관련 상폐 사유 발생시 바로 상장폐지 절차를 밟지 않는 대신 상장적격성 실질심사를 받게 하는 것이다. 만일 실질심사를 통해 상장폐지 심사 대상이 되면 코스피 상장사는 2심제, 코스닥 상장사는 3심제를 거치게 된다.
상장 업무를 담당하는 거래소 관계자는 "형식적 상장폐지 요건을 실질심사 사유로 전환했다는 것은 기업 계속성과 경영 안정성 등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따져보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코스피 상장 종목은 2년 연속자본잠식률 50% 이상, 2년 연속 매출액 50억원 미만인 경우 실질심사를 받게 된다. 코스닥 상장 종목의 경우엔 2회 연속 자본잠식률 50% 이상, 2회연속 자기자본 10억원 미만, 2년 연속 매출액 30억원 미만, 2회 연속 자기자본 50% 초과 세전손실 발생시 실질심사 사유가 발생한다.
거래소는 또 이의신청 기회도 확대하기로 했다. 현재는 상장폐지 사유 가운데 '감사의견 비적정' 등 특정 경우에만 이의신청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에 이의신청 허용 사유에 코스피는 '정기보고서 미제출'을, 코스닥은 '정기보고서 미제출', '거래량 미달'을 추가했다. 이의신청시 개선기간을 받을 수 있다.
형식적 상장폐지나 실질심사 요건도 일부 폐지한다. '주가 미달', '반기 단위 자본잠식' 요건을 형식적 상장폐지 사유에서 삭제했다. '5년 연속 영업손실', '2년 연속 내부회계 비정적 의견'은 실질심사 사유에서 뺐다. 4년 연속 영업손실이 발생하더라도 관리종목으로 지정되지 않는다.
거래소는 다음 달까지 상장규정과 시행 규칙 개정을 마무리 짓고 내년 3월 회계 결산 전까지 시행할 계획이다.
거래소가 상장폐지 요건 완화에 나선 것은 3년 만이다. 실제로 당시 상장폐지를 당하는 기업 수가 단기적으로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났다.
2018년 11월 외부감사법이 시행되자 이듬해인 2019년 상장폐지 절차를 손봤다. 당초 감사의견 비적정 의견을 받은 기업에 곧바로 상장폐지 결정을 내리지 않고, 다음 연도 감사의견에서 적정 의견을 받을 경우 거래를 유지하기로 했다.
코스닥 상장사에 부여할 수 있는 개선기간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렸다. 그 결과 감사의견 비적정 의견으로 상장폐지된 사례는 2018년 12건에서 2019년 1건으로 줄었다.
산업계 '반색'...좀비기업 잔류 우려도
기업들은 상장폐지 완화 방침에 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나 코로나19 대유행 여파로 3년째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했던 여행업계가 반색하고 있다.
일례로 노랑풍선의 경우 올해 흑자전환에 실패할 경우 4년 연속 영업손실 발생으로 관리종목에 지정될 위기였다. 그러나 상장폐지 요건이 완화됨에 따라 노랑풍선은 관리종목 지정 리스크를 피할 수 있게 됐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코스닥 상장사, 특히 기술특례상장으로 증시에 입성해 아직 사업 초기 단계에 있는 기업들과 투자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재무건전성이 좋지 않은 이른바 '좀비기업'들이 시장에 남게 돼 오히려 시장과 투자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희활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가급적 시장 잔류를 원하겠지만, 부실한 기업이 퇴출되지 않으면 오히려 시장건전성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다"이라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또 "상장폐지 위기에 몰린 부실 종목이 주가 조작에 활용되는 등 투기대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며 "이는 시장 신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상장 절차가 더디게 진행돼 거래정지가 무기한 이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금융규제혁신회의에서도 실질심사 확대로 인한 퇴출절차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거래소 관계자는 이같은 우려 해소를 위한 조치에 대해 "우려를 인지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확정된 게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