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은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생활을 위한 핵심적인 소득 보장수단 중 하나다. 그중 퇴직연금은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국민연금 다음으로 노후 준비에 중요한 연금으로 꼽힌다. 하지만 현실은 과거의 퇴직금 제도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한 채 모두의 무관심 속에 잠들어 있다. 비즈워치는 연금개혁의 사회적 공론화 움직임에 발맞춰 [대한민국 퇴직연금 리포트] 시리즈를 통해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의 현주소를 짚어 보고 실질적인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국내 퇴직연금 시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말 300조원을 돌파한 후 올해 상반기에만 적립금 10조원을 추가해 345조원을 넘어섰다. 금융투자업계 내에서는 10년 뒤인 2032년에는 적립금 규모가 지금의 2.5배인 860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수백조원 시장이 추가로 열리는 만큼 전 금융권이 퇴직연금 시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퇴직연금이 '양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데 반해 수익률 등 '질적' 성장은 규모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다.
'쥐꼬리 수익률'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정부가 매년 새로운 수익률 개선책을 내놓고 있지만 수익률은 외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지난달 발표한 2022년 연간수익률은 0.02%로 2020년(2.58%), 2021년(2%)에 이어 연속 하락 중이다.
최근 5년과 10년 연환산수익률도 각각 1.51%, 1.93%로 2%를 넘기지 못했다. 장기투자상품임에도 임금상승률,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연금' 기능은 커녕 이대로 가다간 저출산·고령화에 더해 노후빈곤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를 것이란 우려까지 나온다.
수익률 책임 없어 '양적 성장' 치중…쏠림에 경쟁도 어려워
전문가들은 이같은 퇴직연금 문제의 근본 원인을 '사업자의 책임 부재'와 '가입자 소외'로 꼽는다.
퇴직연금 운용사업자(금융사, 이하 사업자)는 적립금 규모를 키울수록 높은 수수료를 받는다. 다만 사업자는 상품을 기업에 제공할 뿐 실질적인 운용은 뒷단의 자산운용사 등에서 한다. 규모를 키울수록 사업자 수익은 높아지는데, 수익률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 '양적 성장'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구조란 것이다.
업권별 쏠림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해 말 기준 금융업권별 퇴직연금 적립금은 은행이 50.9%(108조원)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어 증권 22.0%(74조원), 생명보험 21.6%(73조원), 손해보험 4.3%(14조원), 근로복지공단 1.2%(4조원) 순이다.
특히 46개 퇴직연금 사업자 중 11곳이 전체 적립금의 77%를 차지했는데, 미래에셋증권을 제외한 10곳은 원리금보장 운영방식 비중이 높은 은행과 보험권이 독식 중이다.
사업자별로 보면 적립금 규모 부동의 1위는 삼성생명이다. 적립금 약 45조원으로 홀로 전체 시장의 13.3%를 점유하고 있다. 이어 6개 은행(신한·국민·하나·기업·우리·농협은행)이 전체 적립금의 46%를 보유 중이다.
생명보험사의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94%, 은행권의 원리금보장 상품 비중은 87.2%에 달한다. 손해보험은 98.8%로 가장 높고, 금융투자업권마저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70%에 달해 전체 퇴직연금 시장의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85.5%에 달한다.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올해 7월 본격 도입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마저도 원리금보장 상품이 전체 적립금의 85.3%(8월 14일 기준, 에프엔데이터랩)를 차지하고 있다.
퇴직연금의 저조한 수익률 문제는 여기서 온다. 오랜기간 이어져온 저금리 상황에서 예·적금에 투자하는 원리금보장 상품에 적립금이 집중된 퇴직연금이 높은 수익률을 낸다는 것이 오히려 '어불성설'인 셈이다.
김재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낮은 문제는 여전히 원리금보장 상품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노후보장, 책임 문제 등으로 고용부의 운용규제 자체가 안정성을 지향하는 측면이 강해 다른 금융상품에 비해서도 개인이 위험자산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약하다"고 지적했다.
기업의 폐업·파산시 근로자가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제도 도입 취지도 무색한 상황이다. 고용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퇴직연금 도입률은 30인 이상 사업장이 78.9%로 높아졌다. 하지만 30인 미만은 24.0%에 불과해 전체 사업장 도입률은 27.1%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가입 필요성이 높은 영세사업장 가입 대상자 75% 이상이 제도 자체에서 소외된 셈이다. 바꿔말하면 퇴직연금 도입취지 성과는 2005년 도입 후 근 20년 동안 고작 30%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원은 "퇴직연금은 약 20년간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지만 정작 제도가 필요한 영세사업장 가입률은 30%에도 미치지 못한다"면서 "사각지대로 남아있는 부분과 낮은 수익률이 퇴직연금의 질적 성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당국 수익률 제고방안 진척 더뎌…근본대책 시급
정부가 내놓은 퇴직연금 개선방안도 미봉책에 불과해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올해 초 고용부와 금융당국은 퇴직연금 시장이 양적경쟁에서 질적경쟁 시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가입자가 해지 손실 없이 금융사를 변경할 수 있는 '연금상품 실물이전 방안'을 마련한다고 밝혔다.
사업자 변경이 쉬운 환경을 조성해 연금시장 경쟁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란 복안에서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실물이전 방안 마련을 위해 계속 논의를 진행 중"이라며 "시스템 마련을 위해 비용이 드는데다 업권별로 규모나 적립금 비중 등에 따라 입장이 모두 달라 조율이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제도 자체가 실현 가능한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시스템 마련이나 전산 비용 등의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업자 간 보유하고 있는 펀드나 상품이 완전히 같아야 실물이전이 가능하다는 점"이라며 "금융사가 모두 동일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물이전이 어렵고, 하게 돼도 아주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 역시 공통된 문제를 지적한다. 남재우 연구원은 "계약이전은 경쟁 촉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실물이전이 되지 않으면 자산을 매각 후 이동해야 하는 만큼 평가손실이 실현돼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장기투자 기조에 맞지 않다"면서 "사업자가 동일 상품을 취급해야 할 뿐 아니라 보험사는 보험계약, 은행과 증권은 신탁의 형태로 계약구조도 달라 현실화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고용부가 상반기 내 수립하기로 했던 '퇴직연금 기능 강화방안' 마련도 아직이다. 손재형 고용부 퇴직연금복지과장은 "연금개혁, 예산안 등이 함께 진행되다 보니 방안 마련이 늦춰지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발표 시기도 확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미봉책에 그치는 수익률 제고 방안이 아닌 교육문제 등 가입자가 소외된 현 퇴직연금의 근본적인 구조를 우선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퇴직연금 교육 절실, 사업자 수익률 책임 강화해야"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근퇴법)은 기업(사용자)이 근로자인 가입자에게 매년 1회 이상 퇴직연금제도 교육을 실시토록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확정기여형(DC)은 운용결과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는 만큼 투자지식이나 운용방법에 대한 가입자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기업과 별개로 개인이 가입할 수 있는 개인형퇴직연금(IRP)은 이를 운용하는 사업자에게 교육 의무가 있다. 의무 불이행 시 최대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되는 등 퇴직연금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힌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퇴직연금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물론 아예 받지 않은 건 아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부실한 교육이라는 얘기다.
기업이 교육의무를 사업자에 위탁할 수 있고, 온라인 동영상 교육이나 우편, 이메일로 교육자료를 단순 배포하는 서면교육도 인정하고 있어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제도에서 가입자가 소외된 가장 큰 이유다.
정부가 교육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해부터 전문교육기관에 교육을 위탁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변경했지만, 별도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교육을 위탁하는 기업이 거의 없어 제도 변경도 의미없는 상황이다.
김성일 사단법인 퇴직연금연구회 회장은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입자가 소외'돼 있는 구조"라며 "퇴직연금 가입자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기재인 교육의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업자가 수익만 창출해도 문제가 없는 '가입자 약탈 구조'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회사는 금융기관과 대출로 얽혀 있어 상호 포섭된 관계인데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아닌 회사와 퇴직연금 사업자가 계약을 맺는 '계약형 구조'기 때문에 가입자가 소외될 수밖에 없다"면서 "사업자가 수익률에 책임을 지지 않는 계약형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