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은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생활을 위한 핵심적인 소득 보장수단 중 하나다. 그중 퇴직연금은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국민연금 다음으로 노후 준비에 중요한 연금으로 꼽힌다. 하지만 현실은 과거의 퇴직금 제도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한 채 모두의 무관심 속에 잠들어 있다. 비즈워치는 연금개혁의 사회적 공론화 움직임에 발맞춰 [대한민국 퇴직연금 리포트] 시리즈를 통해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의 현주소를 짚어 보고 실질적인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수익률 0.02%
지난해 퇴직연금 전체 가입자의 연간수익률이다. 금리상승과 주식시장 하락이 맞물리며 수익률 통계 공시 이후 최저 수준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에서는 1.83%의 수익률을 기록했지만 실적배당형에서 -14.2% 손실을 냈다.
상품별로 보면 회사(사용자)가 운영하는 확정급여형(DB)은 1.51%, 가입자(근로자)가 직접 투자를 결정하는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은 각각 -1.21%, -3.14%로 집계됐다. 최근 5년(2018~2022)과 10년(2013~2022) 연환산수익률도 1.51%, 1.93%로 2%에도 못 미치는 수익률에 그쳤다.
이처럼 '낮은 수익률'은 퇴직연금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국민연금과 함께 노후소득을 보완할 버팀목으로 거론되지만 저조한 수익률로 인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품 관리수준을 높여 원리금보장형 위주 상품구조를 벗어나는 한편, 사업자 책임이 낮은 계약형 지배구조에 대한 개편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10명 중 7명 퇴직연금 방치... 교체 어려운 사업자 변경
실상 퇴직연금 가입자 10명 중 7명은 가입 후 한번도 상품교체를 하지 않고 퇴직연금을 방치하고 있는 상태다. 대부분의 가입자가 상품 교체나 사업자 선정, 금융상품 투자에 어려움을 느껴서다.
퇴직연금 자체에 대한 가입자 접근성이 낮은데다 어떻게 투자해야 할지 투자원칙을 세울만한 제대로된 교육도 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관련기사 : '양적' 경쟁만 치중 가입자는 '뒷전'[대한민국 퇴직연금 리포트]
퇴직연금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와 사업자 감독기구인 금융감독원이 퇴직연금 가입자들을 위해 매년 금융회사별 수익률과 연간 총 비용 등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지만 효용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근로자가 직접 적립금 운용을 통해 수익률 책임을 져야하는 DC, IRP는 가입자가 직접 운용지시를 해야하는 만큼 퇴직연금 사업자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는 회사와 퇴직연금 사업자 간 1대 1 계약에 의해 모든 업무를 일임하는 '계약형' 구조다. 따라서 사업자 선정은 가입자가 아닌 회사의 몫이다.
더욱이 대부분 회사들이 기업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한 은행이나 계열 금융사 등에 퇴직연금 운용을 맡기는 것을 선호하고 있어 가입자의 선택폭은 더 제한적이다.
사업자를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입자는 회사에 요청해 사업자를 추가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근로자 전체(또는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어 회사 내 '퇴직연금 규약'을 변경해야 하는 등 절차가 까다롭다.
'내 수익률'과 상관없는 퇴직연금 '사업자' 수익률
당국이 제시하는 수익률 자체에 대한 효용성 문제도 제기된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상품을 제공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하지만 실제 상품운용은 자산운용사(자산운용기관) 등이 한다. 그러나 공시되는 것은 '운용기관 수익률'이 아닌 '사업자 수익률'이다.
즉 해당 사업자를 선택한 가입자가 개별적으로 운용지시를 내린 상품 수익률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수익률을 보고 해당 사업자를 선정해도 선택하는 상품에 따라 가입자별로 수익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실제 '나의 수익률'과는 차이가 있다.
금융사 관계자도 "사업자별 수익률이 사업자의 운용수익률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면서 "사업자를 선택한 가입자가 다양한 포트폴리오 중에서 어떤 상품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수익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공시되는 사업자 수익률은 실상 가입자 효용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고용부가 발표하는 '퇴직연금 우수사업자' 역시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고용부는 가입자의 선택권 보장과 사업자간 경쟁 유도를 목적으로 2018년부터 사업자 평가를 진행중이며 지난해부터는 평가제도를 법제화 했다.
하지만 가입자 대부분이 제도 자체를 알지 못하는데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우수사업자로 사업자를 변경한다고 해도 아직까지 '연금상품 실물이전 방안'이 도입되지 않아 적립금을 현금화 하는 과정에서 해지 손실을 볼 가능성이 있다.
금융사 관계자는 "퇴직연금 사업자 평가를 하면서 이전에 비해 서비스 질 개선 등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서도 "평가 기준이 개별사의 운용 전략 등은 반영하지 못하고 대형사 위주로 평가 기준이 치중된 부분도 있어 사업자 선택 기준으로 삼기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가입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가입자는 잘 모르고 가장 중요한 수익률이나 운용 평가에 대한 기준도 모호하다"면서 "사업자별로 수익률이 특출나게 높은 곳도 없기 때문에 사실상 평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 학계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들이 나온다.
자본시장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고용부의 금융사 평가 관련 전문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업자 평가 자체를 외부 용역을 통해서 진행하는 것으로 안다"면서 "감독이 아닌 평가제도인 만큼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권고수준에 그쳐 분명한 한계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제도가 가입자를 위한 것이면 가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정보를 알려야 하는데 평가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가입자가 대부분으로 가입자 접근성이 높은 정보는 아니다"며 "별도의 규제가 없는 만큼 가입자 관점에서 평가에 활용된 정보의 신뢰성 등도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사업자가 수익률 책임져야 경쟁 체제 가능
이 때문에 퇴직연금 개선을 위한 실질적 해법으로 연금 지배구조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금형'을 운영 중인 미국이나 영국처럼 사업자가 수익률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시장 내 경쟁체제가 만들어져 낮은 수익률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의 퇴직연금 지배구조는 사업자에게 수탁자 책임을 엄격히 부여하지 않는 계약형 지배구조"라며 "이 상황에서 사업자가 운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수익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업자는 연금자산을 잘 운용하도록 자문하는 중요한 고객 접점임에도 연금사업자 시장이 과점화하면서 이런 유인이 사라졌고 서비스 혁신도 지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성일 사단법인 퇴직연금연구회 회장은 "사업자가 수익률에 책임을 지지 않는 계약형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면서 "(사업자의 운용관리와 자산관리 업무가 나눠진 만큼) 호주처럼 사업자가 자산운용업무를 하는 자회사를 편입하도록 해 수익률에 대한 공동책임을 지도록 하거나 상품보관 수준의 사업자의 '자산관리업무'를 '자산운용업무'로 바꾸는 등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정착한 계약형 제도에서의 변화가 쉽지 않은 만큼 기존 제도에서 일부분을 기금형처럼 운용하는 방안도 나온다.
박종원 서울시립대 교수는 "퇴직연금 제도 개선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연금제도 전체 틀 속에서 퇴직연금이 어떤 모습을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서 "계약형이 자리잡은 만큼 단기간의 전환은 쉽지 않겠지만 DC형을 묶어 CDC(집합적 DC제도)등 일부를 기금화해 운영하는 체계를 마련하는 등 장기적으로 기금형으로의 지배구조 전환 방법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노후 통합 관리할 연금청 도입 필요"
퇴직연금이 개인연금과 함께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만큼 전체적인 '연금' 제도의 큰 틀 안에서 장기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제도의 연속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통합적인 관리기구가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관련부처가 여러 곳인 만큼 헤게모니(주도권) 문제로 제도가 오락가락하거나 제도 추진의 연속성이 부족한 부분이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면서 "퇴직연금 제도의 문제점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연속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관리부처를 단일화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내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금융당국 한 고위 관계자는 "퇴직연금 관련 업무를 부처간 논의를 통해 진행하고 있지만 헤게모니는 고용부가 쥐고 있다"면서 "부처간 차이가 있는데다 업권별로 요구도 달라 제도나 업무 추진에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석진 금융투자협회 산업시장본부장은 "퇴직연금은 국민연금, 개인연금과 함께 노후생활 보장을 위한 연금의 3층체계 중 한 축으로 서로 보완적인 필요성이 있다"면서 "국민연금으로 부족한 소득대체분을 퇴직연금 등에서 높이기 위해서는 넛지(유도할 수 있는) 유인을 줘 가입자 참여와 수익률을 높이는 한편, 공적연금의 재정부담을 낮추는 등 상호보완적 관계를 가져갈 수 있도록 통합적인 관리기구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연금제도를 통합 관리할 '연금청' 도입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현재 공적, 사적연금의 관리기관이 나뉘어져 있는데 부처 어디에서도 통합적인 정보를 파악하거나 그에 기반해 통합적인 노후소득 설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국민노후생활을 통합 관리할 연금청 설치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이를 위한 관련 법안 추진은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상태다.
김병욱 의원실 관계자는 "현재 정부의 연금제도 개편은 국민연금에 모든 관심이 집중돼 있고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다"면서 "고용부가 주무부처긴 하지만 자산운용 등 전문성에는 한계가 있어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총괄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데 금융당국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진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퇴직연금을 비롯해 전체 연금의 수익률 제고 등의 차원에서도 연금개혁, 연금청 도입은 중요한 의제"라며 "계속해서 관심 갖고 연금청 도입 방안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